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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2.12 09:18 수정 : 2014.12.12 09:20

박민정 소설 <10화>



수건은 충분하다. 큰 담요만 한 수건도 넉넉해서 욕조 앞에 한 장 깔아두었다. 입욕제가 거품이 되어 몽글몽글 솟아난다. 재이는 자꾸 거품을 잡으려고 한다. 거품은 재이의 손에 쉬이 잡히지 않고 작고 낮은 코끝에 가서 앉는다. 재이는 후후 불며 코끝의 거품을 몰아내려 애쓴다. 그런 재이의 행동은 마치 베이비 로션 광고에 나오는 앙증맞은 아이의 그것 같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본다. 넌 어디에서 왔니. 재이를 낳아준 여자를 이미 오래전에 잊었다. 그러나 가끔은 재이에게 그 여자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그게 어떤 모습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내겐 없는 아름다움이 재이에게 있다면 그 여자가 준 것일 터였다. 내게 없는 것들이 보일 때마다 어떤 여자를 생각한다. 정확히는 어떤 여자의 어떤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그 아름다움의 일부를 하루 종일 골똘하게 생각하던 날도 있었겠지.

재이의 보디로션은 어느새 제법 줄어 있다. 나에게는 날마다 일회용 어매니티가 배달되므로 소모품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허 교수의 인생은 꽤 진행되었다. 호텔 근처의 식당도 제법 들러보았고, 인터넷에 올라오는 맛집과 진짜 맛집을 구분할 줄도 알게 되었다. 재이를 데리고 나가 다양한 배경의 사진을 찍어주었고, 호텔에서도 꽤 많은 사진을 찍었다. 대부분의 사진에서 재이는 그림책을 들고 있다. 나중에 재이가 이 사진들을 증거로 자신은 세 살에 이미 한글을 뗀 천재소녀였노라고 주장할 것 같다는 상상을 하면 즐겁다.

재이는 그림책을 본다. 허 교수는 호텔로 꽤 많은 그림책을 보내주었다. 책을 들춰보면 놀랄 만큼 아름다운 색채의 그림이 가득했다. 내가 작업하는 동안 재이는 책에 있는 그림들을 구경하고, 디브이디를 보거나 낮잠을 잔다. 나는 거의 매일 밤 재이를 재우며 그림책을 읽어주었다. 재이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다 잠을 잔다. 그러나 잠든 재이의 눈동자가 닫힌 눈꺼풀 아래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걸 본다. 재이는 재미난 꿈을 꾸고 있는 중이다. 그럴 때면 내가 읽어준 동화가 재이의 꿈속에서 펼쳐지고 있노라는 확신이 든다. 곤돌라를 타고 날아다니기를. 곤돌라도, 바깥세상도, 그저 안전하기를. 재이가 겪을 앞날은 그저 안전하기를 바란다. 재이를 낳아준 여자처럼 어느 날 덜컥 아이를 갖고 그 아이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그런 인생이 아니기를.

나는 허 교수의 안전한 인생을 쓰며 진심으로 바랐다. 재이의 앞날도 이만큼 평탄하기를. 하루에 한 번씩 재이와 나는 바다 둘레길을 산책했다. 재이는 파도라는 중요한 단어를 배웠다. 파도가 철썩, 철썩. 파도 뒤에 으레 따라붙는 의태어도 배웠다. 바다를 직접 보며 그것을 배웠다는 것이 뿌듯하다. 재이는 가끔 빨간 쿠션에 앉아서도 그 말을 한다. 창밖 바다를 가리키며. 파도가 철썩. 그림책에 바다가 나오면 고개를 갸우뚱하며 창밖을 가리키기도 한다.

산책을 하다 바람이 불면 재이는 곧잘 눈살을 찌푸렸다. 종종 찡그리는 버릇은 나를 꼭 닮았다. 그럴 때면 나는 훤히 드러난 재이의 이마에 잡힌 주름살을 손가락으로 펴주었다. 어머니가 내게 해주었던 것처럼.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날의 청소가 끝나 있다. 청소를 마친 방에 들어가는 일은 매번 신기하다. 아무도 들었던 적 없는 방 같아 새날을 시작하는 실감이 난다. 우리가 벌려놓은 소지품들은 그대로 있는데, 침구며 어매니티 류는 전부 새것이다. 빗과 칫솔, 치약과 화장품들, 면도기, 비누, 샤워블록 등이 모두 비닐에 들어 있다. 경대 앞에 몇 주째 버티고 있는 재이의 화장품들은 날로 낡아간다.

허 교수는 자신이 그 도시를 사랑하게 된 까닭을 발견해보라고 했다. 나는 그녀가 때로 호텔을 찾는 까닭에 동의했다. 쉰이 넘은 그녀가 알코올중독에 놀라울 만큼 교양이 없고 남편과 자식들을 경멸한다는 건 그녀의 생애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비싼 밤들이 아직 많이 남았다. 오늘 밤도 내 앞에 벌거벗고 누워 있다. 밤이 충분하므로 아직 꽤 남은 원고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 오늘도 일정량의 원고를 쓰고 재이의 곁에 누워 잘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아침에는 욕조에 물을 받을 것이다.

나는 재이와 나를 여기에 보낸 허 교수의 저의를 다소 의심한다. 글을 쓰면서 꿨던 꿈을 생각한다. 명품 카탈로그만큼이나 화려하고 말도 안 되는 꿈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패션지를 보는 여자들을 비웃으며 그녀들이 아무리 명품을 욕망한들 소용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래전 내가 쓰고 싶은 글만 쓸 때의 이야기다. 이제 남은 과제는 세상의 모든 글쓰기를 감당하는 일이다. 내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 역시 글쓰기라는 행위다.

나는 노트북을 덮고 침대에 모로 눕는다. 재이가 작고 부드러운 발로 얼굴을 툭 건드린다. 나는 재이의 발바닥에 입을 맞췄다. 언제나와 같이 달콤한 재이의 발 냄새 때문에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아빠,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재이가 유창하게 말하는 꿈. 오늘의 나를 꾸짖는 꿈.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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