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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2.16 09:28 수정 : 2014.12.16 09:28

최정화 소설 <2화>



조심스러운 경계의 태도는 몸에 배어 있는 듯했어요. 그저 묵묵히 식사에만 열중할 뿐, 반찬이 맛있느니 방이 어떻다느니 하는 의례적인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람들이랑 굉장히 빨리 친해지는 편인데, 어쩐지 선생님하고는 그게 잘 안 됐어요. 보통은 괜히 허허 웃는다거나 먼저 내 얘기를 털어놓거나 하며 긴장을 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파고들 만한 틈을 발견하게 되잖아요. 선생님에게서는 그런 틈새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호칭만 해도 그래요. 제가 다섯 살이나 나이가 적으니 편하게 말을 놓으라고 거듭 말해도 선생님은 또박또박 내 이름을 부르고 이름 뒤에 ‘씨’를 빠뜨리는 일 또한 없었습니다.

“미옥 씨, 저 오늘은 점심 생각이 없어요.”

“먼저 잘게요, 미옥 씨.”

그러고 보면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꽤 오래전의 일이긴 해서 반가운 마음도 들었지만 어색하고 불편한 것 또한 사실이었어요. 나는 선생님이 내게 말을 편하게 하고 좀 더 친하게 대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선생님을 ‘언니’라고 부르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게 될 거라고 내심 기대를 했었거든요.

선생님은 말이 없는 분이었어요. 처음 며칠 동안은 낯을 가리는 거라고 여겼는데 이후로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의 생활은 굉장히 정돈되고 규칙적인 것이어서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도,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거의 일정했고 식사를 하는 시간이랑 산책을 하는 시간 외에는 방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으니까요. 같이 연속극이라도 보면 어떻겠냐고 권했지만 텔레비전을 보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선생님이 산책을 나갈 때마다 같이 가면 좋겠다고 생각만 할 뿐 흐트러짐 없는 꼿꼿한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따라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시도가 거절당하자 더 이상 선생님과 친해지려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한집에 살면서도 좀처럼 틈을 주지 않는 선생님이 야속하기도 했고 막상 마음을 접으니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화 없이 밥상을 마주 보고 있는 것도 익숙해져서 선생님이 거실을 들락거릴 때 시답지 않은 말을 거는 일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반쯤은 포기하고 지내던 중 기회가 생겼어요. 선생님이 방에 들어오고 보름 정도 지났을 즈음이었습니다. 닭 때문이었어요. 저는 밭에서 피마자 이파리를 따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마당에 들어서니 닭 한 마리가 선생님에게 달려들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어요. 얼른 닭을 잡아다가 닭장에 넣었지요. 어떤 경우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선생님이었는데 어찌나 호들갑을 떨던지 머리카락이 다 엉클어져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툇마루에 털썩 주저앉았고 나도 닭장 문을 닫고 나서 그 옆에 나란히 앉았어요. 선생님의 얼굴에는 큰일을 치르고 난 뒤의 안도감이 어려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슬쩍 웃었더니 선생님도 미소를 지었습니다. 조금 전에 흥분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부끄러운 듯 보였어요. 선생님이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자 귀엣머리 뿌리 부분이 하얗게 세어 있더라고요. 얼굴에는 연륜이 묻어 있었지만 피부는 하얗고 주름도 없어서 나보다 서너 살 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센머리 때문인지, 전에는 이렇게 가까이 앉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 인상이 달라 보였습니다.

선생님은 고개를 들고 먼 산을 바라보며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거죠.”

“네?”

“동물 공포증이라는 게 실은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거니까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선생님은 피식 웃더니 너그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궁금해 옆으로 조금 당겨 앉았어요.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누군가 개를 무서워한다면 그건 정말 개가 무서운 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그렇게 드러난다는 거예요.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보았지만 참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그만 깔깔 웃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무서운데 개를 무서워한다고요?”

나의 반응에 선생님은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습니다. 나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에이, 말도 안 돼요. 개가 무서운 건 그저 개가 무서운 거죠.”

선생님은 뭔가 내게 설명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마당 쪽을 잠깐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건 아닐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돌린 선생님은 내 얼굴을 마주 보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머릿속이 아주 개운해진 기분인데요, 미옥 씨.”

선생님의 표정이 꽤나 밝아졌기 때문에 나는 무슨 자랑스러운 일이라도 한 듯이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별거 아닌 일이지만 선생님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에 우쭐해졌던 겁니다.

“눈앞에 펼쳐져 있던 자욱한 안개가 걷힌 것 같기도 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어쩐지 쓸쓸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인지, 늘 단정하게 차려입고 흐트러지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선생님이 가엾어 보였습니다.

“산책을 나가려던 길이었는데 내 정신 좀 봐.”

곱게 접은 양산을 펴고 선생님이 마당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대문 앞에서 선생님이 뒤를 한번 돌아보았고 나는 늘 그래왔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궁둥이를 털고는 한 마리 강아지마냥 선생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렇게 선생님과의 첫 산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로 선생님과 간단한 대화 정도는 나누게 되었답니다. 나이도 물어보고, 이렇게 혼자 지내는 게 외롭지는 않은지, 주로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이것저것 물어보았어요. 이제야 선생님이 나에게 서서히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것 같았어요. 선생님은 내가 밭에 나가 있으면 선물로 받았다는 차를 담아 와서 같이 마시기도 하고, 내가 장을 보러 갈 때 따라나서는 일도 있었습니다.

선생님이랑 같이 버스에 타면 사람들이 모두 우리 쪽을 쳐다보는 것 같았어요. 조심스러운 표정이나 깔끔한 옷매무새 때문에도 그랬겠지만 선생님의 걸음걸이, 앉아 있는 자세는 우리 동네 사람들과는 어딘가 달랐으니까요. 똑같이 발을 내딛고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는데도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었어요. 선생님이랑 같이 다니는 것만으로도 나는 특별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어깨가 펴지고 걸음걸이가 당당해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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