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화 소설 <3화>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주로 대여섯 시 무렵입니다. 그때쯤이면 선생님이 글 쓰는 일을 정리하고 산책할 채비를 하거든요. 간편한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근처 호수로 난 길까지 걷습니다. 떠드는 사람은 주로 저였어요. 친구인 경선과 있었던 사사로운 일들이나, 최근 귀농하러 내려오는 이들에 관한 얘기들을 늘어놓았지요. 경선이가 프러포즈를 받았을 때 옆에서 지켜보며 느낀 묘한 질투심 같은 것을 털어놓으면 신부님께 고해성사라도 하고 난 듯 마음이 후련해졌어요. 선생님은 대수롭지 않은 제 얘기에 귀를 기울였고 침착하고 조심스럽게 조언을 해주었어요. 내가 털어놓는 대개의 일들에 대해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해주었죠. 그러면 나는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도 좋았지만 선생님과의 거리가 이제는 꽤나 가까워졌다는 생각 때문에 무엇보다도 신이 나는 겁니다. 산책 중에 전화가 걸려오면 나는 선생님에게서 뚝 떨어져 딴청을 했어요. 나랑 얘기할 때처럼 다른 사람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기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나는 선생님과 걷는 길이 그저 좋기만 해서 서너 시쯤 되면 벌써부터 산책 시간이 기다려지고 시간이 통 흐르지 않는 것 같아 자꾸만 시계를 흘끗거리곤 했습니다.
사이가 더 가까워졌던 건 선생님이 쓴 소설을 읽고 그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부터였어요. 사실 처음에 선생님은 저한테 글을 보여줄 생각이 없었어요. 매번 쓰레기통 옆에 쌓아두는 파지를 무심코 갖다 버리곤 했는데 그날은 무슨 생각에선지 내용을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한두 문장을 따라 읽다가 그게 선생님이 쓰신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로는 선생님이 버린 종이를 따로 챙겨두었다가 읽는 일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저녁을 먹고 나서였는지 그 전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식탁에 앉아 선생님이 쓴 소설을 읽고 있다가 그만 들키고 말았어요. 나는 무슨 잘못을 저지르다 들킨 아이처럼 당황했는데 예상외로 선생님의 얼굴은 밝아 보이더라고요.
“어땠나요, 미옥 씨?”
선생님은 나에게 소설을 읽고 난 소감을 듣고 싶다고 했고, 나는 재미있게 읽었다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멋이 없는 대답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식탁 의자에 앉더니 의자를 바싹 끌어당겨 고개를 내 쪽으로 기울이고는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다고 했어요. 떠오르는 말은 없고 가슴은 쿵쾅거리기만 해서 더듬거리며, 이 사람이 이렇게 했을 때 속이 시원했다느니,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제일 싫다느니 하는, 소감이라고도 평가라고도 할 수 없는 단순한 얘기들을 지껄였습니다. 사실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정말 궁금해하는 것 같았고, 막상 얘기를 꺼내자 너무 진지하게 듣는 바람에 대충 마무리 지을 수가 없었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반짝이는 선생님의 눈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얘기를 꾸며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미옥 씨,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선생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습니다. 잠깐 쉬려고 나오셨던 선생님은 도로 방으로 들어갔고, 그날은 산책을 하러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호수 길을 걸으면서 선생님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뿌듯했습니다. 혼자 걷는 일이 조금 쓸쓸하기는 했지만 선생님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면 이 정도야 감수해야 하는 게 아니겠냐는 생각이었어요.
다음 날도 선생님은 막 프린터에서 뽑은 원고를 건넸습니다. 저번처럼 이야기를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땠는지 얘기를 해준다면 도움이 되겠다는 거였어요. 나는 원고를 받아 들고 소설을 읽었습니다. 이번에도 선생님의 눈빛에는 내 의견이 궁금하다는 진심이 묻어 있어서 나는 선생님이 묻는 대로, 재미있는 부분이나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 그 정도 수준의 것들을 말했습니다. 때로 선생님은 이 부분이 어땠느냐며 특정 장면에 대한 느낌을 묻기도 했고 등장인물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지 궁금해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렵게만 느껴지던 일이 차츰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내 생각을 제법 술술 늘어놓게 되었답니다.
그런 일들이 몇 번 반복되자 선생님은 원고를 쓰면 으레 나에게 보여주게 되었고 나도 그 일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어요. 원고를 들고 방에서 나올 때 선생님은 지쳐 있었지만 내가 이런 부분이 좋았다, 여기가 특히 마음에 든다는 얘기를 하면 얼굴에 기운이 돌고 눈빛이 반짝이고 걸음걸이도 아주 명랑해져서 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 날에는 밤새 방에 불이 켜져 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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