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화 소설 <4화>
선생님이 방에 들어온 지 두 달이 지났을 무렵입니다. 열흘 정도 원고에 진전이 없어서 선생님은 많이 초조해 보였고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그렇게 끙끙대다가 내민 원고였기 때문에 나는 소설을 읽기 전부터 이번에는 반드시 선생님께 힘을 실어드려야겠다고, 어떤 이야기이든지 간에 좋은 말을 해서 기운을 북돋워드려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원고를 받아 들자 선생님은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겨우 열흘이었는데, 그렇게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이 꽤나 오래간만의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나는 마치 오랫동안 헤어진 연인과 다시 데이트를 하는 처녀처럼 마음이 들뜨고 말아, 소설의 내용이 제법 진지하고 슬픈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저 좋았던 겁니다. 선생님은 내가 다 읽기를 기다리며 툇마루에 걸터앉아 종아리를 쭉 펴고 있었어요. 발끝을 까딱거리는 그 모습이 소녀 같았어요. 곁눈으로 선생님을 힐끔거리면서 나는 열심히 원고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재미있는데요.”
선생님은 가슴 위에 한 손을 얹더니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얼마나 염려를 했는지 모를 거예요. 어떤 부분을 쓸 때는, 나 혼자 이 얘기를 믿고 있는 게 아닌가, 확신이 서지 않는 경우가 있거든요.”
선생님은 내게서 원고를 받아 중간 부분을 들춰보더니, 어느 부분이 제일 마음에 드느냐고 물어봤어요. 그 말을 하면서 내 옆으로 살짝 붙어 앉았는데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 마음을 들킬까 봐 괜히 코를 킁킁거리며 몸을 웅크렸습니다.
“주인공 남자가 맞는 장면이 정말 생생했어요. 글자로 읽는 게 아니라 진짜 그 장면을 보는 것처럼요.”
“맞는 부분이?”
선생님은 보통 웃을 때면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는데 그날은 배에 손을 대고는 허리를 앞으로 숙이며 웃는 모습이 아주 즐거워 보였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모습에 왠지 더 신이 나서 그 장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댔고 선생님은 내게 미옥 씨는 아마 마조히스트인가 봐, 라고 말했어요. 나는 마조히스트라는 게 뭔지는 몰랐지만 뜻을 모르는 그 단어조차 마음에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내 앞에서 즐거운 듯 몸을 흔드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어요. 무엇보다 처음으로 선생님이 내게 말을 놓았다는 사실 때문에 기분이 들떴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말린 고구마에 맥주를 마시며 제법 늦은 밤까지 수다를 떨었답니다. 나는 선생님에게 결혼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어요. 선생님은 나와 마찬가지로 혼자 지내고 있으며, 내가 남편이라고 알고 있던 그이는 동생이라고 하더군요. 동생 쪽도 아직 미혼이기 때문에 신경 쓸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선생님과 동생 사이는 보통의 남매 이상으로 친하게 지내고 있다, 때로는 남편같이 든든하기도 하다, 같이 장을 볼 때 남들이 부부로 오해하는 것을 둘은 장난처럼 즐기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말이 그토록 기분이 좋더라고요. 선생님이 나와 같은 혼자이기 때문일까, 생각을 하며 고구마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습니다. 선생님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까 고민하고 있었고, 이런 건 어떨까, 물으면 나는 고개를 젓기도 하고 또 끄덕이기도 하면서 밤이 깊어갔습니다. 추워서 어깨를 움츠리며 슬그머니 선생님의 팔짱을 꼈습니다. 선생님은 싫지 않은 듯 보였고 나는 선생님의 옆에 더 가까이 붙어 앉았습니다. 어쩌면 처음 선생님을 봤을 때부터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이 다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하면서 사이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나는 전처럼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어요.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선생님이 내 표정을 살피기 시작하더라고요. 내가 아무리 재미있었다고 말해도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 싶으면 선생님은 뾰로통해졌어요. 특히나 잘 모르겠다고 덤덤하게 말하는 날에는 불안해 보였습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상황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없어서 그렇다고 설명을 했지만 선생님은 기분이 상한 것이 분명했어요.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만 이 이야기를 읽는 건 아니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미옥 씨 말은 지금 이 부분은 전혀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는 건데…….”
내 손에서 원고를 낚아채듯 가지고 가는 모습은 평상시 침착하던 선생님이 아니었습니다. 꽤나 낙담한 표정이었는데도 그 얼굴을 본 순간 묘하게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내가 한 말이 선생님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거예요. 어떤 얘기를 나누어도 전에는 절대 동요하지 않던 선생님이었는데, 이렇게 무턱대고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나의 한마디 때문에 얼굴색이 변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나는 처음으로 선생님과 내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후로는 선생님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무덤덤한 반응을 피하려고 노력했어요.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은 빼놓고 좋은 부분만 말하되 표정에도 신경을 썼고 선생님이 만족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면 더 호들갑을 떨며 재미있다고 감탄을 했지요.
그날도 선생님의 기운을 북돋워주고 나서 혼자 산책을 하고 있었어요. 나는 땅에 떨어진 꽃잎을 밟으며 지나갔습니다. 꽃을 밟는 발끝에 힘을 주자 으스러진 꽃잎에서 꽃물이 배어 나왔어요. 뭉개진 꽃잎을 내려다보는데 문득 재미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선생님과 같이 산책을 하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동시에 선생님과 나의 관계가 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에는 내 쪽에서 쥐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면 이제 내 한마디가 선생님에게 기운을 불어넣기도 하고 의기소침해지게 하기도 했으니까요. 신기했습니다. 나는 이전의 새초롬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당당한 선생님을 잃어버린 것 같아 아쉬운 한편으로 조금은 우쭐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원고를 쥐고 있는 순간만은 내가 관계를 주도할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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