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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2.19 09:13 수정 : 2014.12.19 09:13

최정화 소설 <5화>



선생님이 새로 쓴 원고라며 프린트를 내밀었을 때 나는 맛있는 음식이 떠올라서 군침이 도는 것처럼 묘한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내 앞에서 흔들리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지요. 언제나 차분하고 조용하고 흔들림이 없는 선생님이 내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습을요. 그건 참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었어요. 선생님이 싫어서 그랬느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만난 그 누구보다 선생님을 좋아했으니까요. 하지만 선생님은 내가 웃을 때도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고 내가 눈물을 보이거나 기운이 빠져 있을 때도 조용히 등을 쓰다듬을 뿐 한 번도 감정을 내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 있는 것보다 더 외로웠고, 차라리 화를 내도 좋으니까 분명하게 전해지는 강렬한 감정을 전해주길 원했어요. 어리석다는 말을 듣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순간에는 그저 나와 선생님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을 뿐 다른 생각은 없었습니다.

찬찬히 원고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방금 스치고 지나간 생각 때문에 문장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집중해서 읽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어요. 어깨로, 목으로, 긴장된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고 숨이 조금씩 빨라졌습니다. 글자들을 눈으로 훑고 지나갈 뿐 무슨 내용인지 파악을 할 수 없었어요. 나는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습니다. 아마 그 모습이 선생님에게는 의아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었습니다.

“왜요, 미옥 씨? 이야기가 별로인가요?”

선생님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지만 평소와 같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나는 부러 순진한 표정을 짓고 선생님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았어요. 그리고 전에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하게 얘기해도 되느냐고 묻자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나는 선생님을 흉내 낸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선생님, 이번 얘기는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선생님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마음이 흔들렸어요. 내 예상이 맞아떨어졌다는 쾌감과 함께 마주 앉은 이의 어두운 마음이 옮겨져 오는 것 같았거든요. 그러나 이미 시작한 일이었어요. 나는 계속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습니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이 이야기는 저한테는 별로 재미가 없어요.”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림이 없을 것 같은 선생님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힘을 잃는 것을 나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마당 건너편으로 고개를 돌려 잠시 먼 산을 바라보고 나서 다시 내 쪽을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은 예전의 평화를 되찾은 듯 보였습니다. 그러자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짜증이 한꺼번에 치밀어 올랐습니다.

“어떤 부분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요?”

선생님은 미소까지 짓고 있었어요. 순식간에 어둠을 거두어내고 평정을 찾는 모습이 왠지 분해서 나는 더 힘을 주어 말했어요.

“어느 부분이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애매해요. 그냥 느낌이니까요.”

심장이 두근거려서 숨을 골라야 했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아무것도 느낀 것이 없어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그게 전부예요.”

선생님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떨어뜨리고 내 손에서 원고를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그 부분을 찾아내겠다는 듯 처음부터 마지막 장까지 빠르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의 찌푸린 미간과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눈빛과 낙담한 표정이 나를 안도하게 만들었습니다. 내 의도는 정확히 적중했습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어깨와 등줄기에 힘이 빠지며 통쾌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감자를 골라내는 걸 깜빡 잊었다는 핑계를 대고, 원고를 들고 있는 선생님을 놔둔 채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를 향해 걸었습니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어요. 선생님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몹시 궁금했거든요. 하지만 꾹 참았습니다. 발을 내딛는 기분이 평소와 달랐습니다. 발바닥을 통해 단단한 땅의 기운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창고 문을 열자 감자 썩는 냄새가 풍겼습니다. 봄에 승재네 밭에서 캐온 감자가 썩기 시작한 모양이었습니다. 걱정할 건 없었어요. 감자는 썩어도 버리지 않으니까요. 물에 담가 녹말을 만들어 감자전을 부치면 되거든요. 나는 바구니를 하나 꺼내고 포대에서 썩은 감자를 골라내기 시작했습니다.

감자를 포대에 담아주며 승재 어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감자 썩는 건 순식간이니까 보관을 잘해. 하나가 썩으면 그 옆 감자가 썩고, 또 그 옆의 감자가 따라 썩는 식으로, 그렇게 한 포대의 감자가 모조리 썩어 들어가는 게 한순간이라니까. 그러니 썩은 놈을 발견하면 얼른 골라내야 한다는 말이었지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처음은 겨우 단 한 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전체가 끔찍한 냄새를 풍기게 된다는 거지요.

장난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마음이 단 한 알의 썩은 감자처럼 순식간에 퍼지고 말아, 나는 선생님에게 그런 말들을 내뱉어버리고 말았던 겁니다.

다음 날도 선생님은 제법 흥분된 얼굴로 수정한 원고를 내밀었고 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모르겠어요. 역시 이해가 가지 않아요.”

그러고 나서는 선생님을 위로하듯 덧붙였습니다.

“저야 이야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너무 마음 쓰지는 마세요. 전에는 소설 같은 건 읽어본 적도 없단 말이에요.”

이후로 선생님은 방에서 나오지 않는 시간이 더 길어졌고, 나에게 원고를 보여주지도 않았어요. 낮 동안에는 분명 글을 쓰는 것 같았는데 원고를 보여달라고 말하면 오늘은 진척이 없었다고 둘러대고, 그다음 날에는 쓰긴 했지만 마음에 차지 않으니 좀 더 수정을 한 뒤에 보여주겠다고 그랬어요. 나중에는 묻기조차 머쓱해져서 소설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과의 거리는 쉽게 벌어졌고, 이제는 산책을 따라나서는 것조차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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