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화 소설 <7화>
차 소리가 들리기에 비료가 도착한 줄 알았는데 동생분이 차를 몰고 왔습니다. 나는 고구마를 삶아 매실차랑 같이 대접하고 나서 집을 나섰습니다. 거실에 앉아 있으려니 방 안에서 두런두런 얘기 나누는 소리가 자꾸 들려와서 몰래 남의 말이나 엿듣는 사람이 된 듯 좋지 못한 기분이 들고, 그렇다고 방에 틀어박혀 있자니까 내가 왜 저이들의 눈치를 봐야 하나 싶어져 밖으로 나왔습니다. 간만에 경선의 집에서 놀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꽤 늦은 시간이어서 동생분은 이미 집에 돌아가고 난 뒤였습니다. 선생님의 방에는 불이 꺼져 있었고 접시는 설거지까지 되어 있었어요.
나는 경선에게 얻어온 반찬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방으로 들어왔어요. 이불을 펴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맨바닥에 누워버렸습니다. 마치 세상에 나 혼자 짝이 없는 것처럼 서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밤새도록 텔레비전을 켜놓고 해가 지난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드라마를 보는 것도 따분해지자 후회가 되기 시작했어요. 내가 왜 그랬을까, 왜 선생님의 심기를 거슬렀을까, 그렇게 해서 내가 얻은 건 외로운 생활밖에 없지 않은가, 선생님의 기분을 망쳐서 뭘 어쩌겠다는 거였나 자책을 하며 밤을 새웠습니다.
파랗게 새벽이 올 때까지 잠이 들지 못했고 더 이상은 이대로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일은 선생님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내가 품었던 반발심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감정에 불과했다고, 악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리석기 때문이었다고, 이렇게 선생님을 잃어버릴 줄 알았다면 그런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거라고, 선생님과 대화가 끊긴 지금의 생활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나 자신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느껴진다고요. 내 마음을 모조리 드러내고 선생님에게 용서를 구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이 받아줄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습니다만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괴로워서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더라고요. 그러다 나도 모르는 새 잠이 들었고 일어난 건 정오가 다 지나서였습니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장을 보고 돌아왔는데 선생님 방이 비어 있었어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선생님은 저녁 시간이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더군요.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덜컹거리는 기계음이 들리자 마음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선생님은 기차 안이라고 했어요. 아까 낮에 내가 시장에 갔을 때 원고가 완성되었고, 꽤나 마음에 들어서 당장 출판사에 보낸 뒤 서울로 올라가는 중이라고요.
“그럼 언제 내려오시는 거예요?”
“내려간다고요?”
선생님의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선생님의 웃음소리도 웃음소리이거니와, 늘 나지막하고 느릿느릿하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떠 있어서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음, 다시 내려가기는 힘들 것 같아요. 책을 출간하고 나면 독자와의 대화니, 북 콘서트니 하는 행사들이 열리니까, 미옥 씨가 가능하다면 그때는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통화 중이기 때문에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소리 내어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힘센 바람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웅웅 울려왔습니다.
“소리가 잘 안 들려요. 나중에 다시 걸게요.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미옥 씨.”
전화기를 거실 한가운데 두고 저녁을 먹다가도 전화가 오지 않았는지 살피고 닭 모이를 주다가도 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거실을 들여다보았지만 그날 밤이 깊도록 선생님은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걸지 않을 거면서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나를 골려주고 싶었던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이불을 어깨까지 뒤집어쓰고 이리 뒤채고 저리 뒤채었습니다. 그렇게 자정이 되자 그제야 전화가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성질이 나서 전원을 꺼버리고 밤새 선생님이 묵던 방에 가서 오도카니 앉아 있었습니다. 원고를 건네던 손, 입술의 가지런한 선, 원고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던 걸음걸이 같은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함께 걷던 길도, 나란히 앉아 팔짱을 꼈던 날도요. 책상 위에 프린터가 아직 남아 있으니까 분명 짐을 가지러 오는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시라도 두고 간 물건이 있으면 챙겨드려야겠다 싶어 책상 서랍을 열었다가 맨 아래 서랍에서 지칼을 발견했어요. 서울에서 온 우편물을 뜯는 용도로 쓰인 것 같았는데 금속으로 된 손잡이 부분에 영어로 Y라고 새겨져 있는 지칼은 꽤나 고급스러워 보였습니다. Y는 선생님의 이름 마지막 글자였으니 누군가에게 선물로 받은 게 아닌가 싶었어요. 지칼을 프린터 위에 올려두었다가, 선생님을 기억할 수 있는 징표를 하나 간직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문갑 속에 소중히 넣어두었습니다.
다음 날 트럭이 와서 프린터마저 싣고 가버리자 지난 석 달간에 있었던 일들이 혹시 내가 전부 꾸며낸 이야기는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이 집에서 선생님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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