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화 소설 <8화>
선생님이 그렇게 떠나고 나는 마치 실연을 당한 사람처럼 멍청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어요. 망설이고 망설이다 전화를 걸어보기도 했고 문자를 남기기도 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어요. 나에게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운 날도 있었고 그저 바쁜 거라고 생각한 날에는 서운한 마음이 앞섰습니다. 전화번호가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연락은 포기해버렸어요. 한순간의 장난스러운 마음 때문에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다니, 나 자신을 탓하기도 하고 소식 한번 없는 선생님을 원망하기도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꿈속에서는 여전히 선생님과 한집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잠에서 깬 뒤 선생님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허망했어요. 모든 것이 내가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 같아 두려워지면 문갑을 열고 선생님이 두고 간 지칼을 꺼내 멍하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고 있으면 우편물 봉투를 뜯는 손이 떠오르고 그런 상상을 하고 있는 동안만은 안도감이 들었으니까요.
책이 나오는 날만 기다리며 인터넷 서점을 들락거렸어요. 매일매일 검색 창에 선생님의 이름을 써넣고 엔터 키를 눌렀습니다. 선생님이 예전에 쓴 작품들도 모조리 찾아 읽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그토록 고통스러웠나 보다, 생각하면서 잠시나마 선생님을 이해하지 못했던 시간에 대해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선생님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지요. 떨리는 마음으로 책을 주문하고 택배가 도착하는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표지를 펼쳤을 때 나는 다리가 떨려서 툇마루까지 겨우 걸어갔습니다. 첫 장의 한가운데에 ‘지난여름을 내내 함께한 너에게’라고 쓰여 있었거든요. 사실 그즈음에는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포기한 지 오래였어요. 내가 궁금했던 건 선생님이 여기서 지내던 시절을 가끔 기억이라도 할까, 선생님도 나처럼 그 시간이 즐거웠을까 하는 의문 같은 것이었어요. 하루는 확신에 차 있고 또 다음 날은 의심 속으로 빠져들었지요.
단숨에 책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소설은 나이가 많은 여자와 어린 소녀가 우연히 기차 옆자리에 앉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이었어요. 중반까지는 이미 읽은 내용이었고 소설의 뒷부분은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다 읽고 나니 그동안 선생님이 보여주었던 그 이야기가, 바로 내 이야기라는 걸 알겠더군요. 그때는 상상도 못 했죠. 내가 이야기에 등장하리라고는 상상도 안 해봤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았습니다. 그건 분명 나와 선생님의 이야기였어요. 선생님의 고백이었고 나를 향해 뻗은 손이었습니다. 그 책은 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행동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선생님과의 마지막 통화가 생각났어요. 북 콘서트니 독자와의 만남이니 하는 말들이요. 선생님은 나를 위해 이 책을 썼으니까 내가 그 행사에 꼭 와주었으면 했던 거예요. 나는 마지막 문장을 읽자마자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 접속해서 북 콘서트의 날짜와 장소를 확인했어요. 이제 선생님에게 내 대답을 들려주어야 할 테니까요.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지며 생전 처음으로 숨을 쉬는 것처럼 마음속의 어두운 기운이 한꺼번에 모두 가시는 것 같았어요. 그간의 서러움을 모두 보상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문갑 속에 있던 지칼을 꺼내 핸드백에 넣었습니다. 내 앞으로 헌사된 책이 있으니 징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고 두고 가신 물건이니 선생님에게 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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