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패밀리사이트

  • 한겨레21
  • 씨네21
  • 이코노미인사이트
회원가입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4.12.26 09:30 수정 : 2014.12.26 09:30

최정화 소설 <9화>



포스터에 인쇄된 선생님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봤습니다. 선생님은 내 얼굴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감정을 잘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니까 무덤덤해할지도 모르고 어쩌면 반가운 마음을 참지 못해 웃음을 터뜨릴지도 몰라요. 나는 벌써부터 마음이 울컥울컥하는 게 선생님의 얼굴을 보면 눈물을 쏟게 될까 봐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습니다.

무대 위의 선생님은 유쾌하면서도 차분하고 세련된 모습이었습니다. 얼굴에 조금 살이 오른 것 같고 표정도 밝아 보여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간혹 사회자에게 농담을 던지기도 했지만 소설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열정적이고 진지해 보였습니다. 나는 무대 위의 선생님이 나 자신인 양 어깨가 으쓱해졌어요. 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면 내 입술도 따라 웃었고 선생님의 얼굴이 붉어지면 나도 고개를 숙였습니다.

사회자와의 얘기 도중 선생님의 친구라는 이가 무대에 올랐습니다. 둘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고 했어요. 그 친구라는 사람은 선생님보다 나이가 조금 많아 보였는데 나는 그 여자가 무대에 나타났을 때부터 싫었어요. 선생님에 대해서라면 그 여자만큼은 나도 잘 알고 있다고요. 그 자리에 나를 부르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분한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친구를 소개하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말았습니다.

“늘 친구에게 빚진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 책을 바친다고 첫 장에도 써두었고요. 그 어느 때보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 친구가 아니었다면 그해 여름을 견딜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관객석에 앉아 있는 몸뚱이가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등이 아플 정도로 의자 깊숙이 몸을 박아 넣었습니다. 얼굴이 뜨거워졌다가 땀이 나면서 차가워졌고 그러다 다시 달아올랐습니다. 어깨가 움츠러들고 겨드랑이가 축축했습니다. 땀에 젖은 손바닥을 치맛단에 문지르면서 선생님이 나를 발견하기 전에 얼른 그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얼른 행사장을 빠져나왔습니다.

찬물을 얼굴에 끼얹고 나니까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어요. 휴지로 물기를 닦아내면서 상황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뭘까요? 대체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그 책은 나를 위한 책이고 선생님도 내내 나를 잊지 못했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 어쩌자고 다른 친구를 불러내어 나의 존재를 감추려고 하는 걸까요? 내 실수에 대한 복수인 걸까요? 나를 영영 용서하지 않겠다는 걸까요? 동생이 선생님과 나 사이를 오해라도 했던 걸까요? 그것도 아니면, 나를 완전히 잊어버린 건가요? 설마 기억에도 없는 걸까요? 아니면 애초부터, 함께 지내던 시절에도 나 따위는 안중에 없었던 건가요? 나는 그저 집주인일 뿐이고 선생님은 손님이었을 뿐이었나요?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애썼지만 뒤죽박죽인 머릿속은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그냥 돌아가는 게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혹시 모른다, 완전하게 일방적인 마음이라는 것은 없다, 선생님도 내가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을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도망치고 싶은 수치심에 벌벌 떨면서도, 선생님의 진짜 마음을 확인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복도의 한가운데 테이블이 있었고 선생님은 독자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줄의 끝에 섰습니다. 바닥은 대리석이었는데 너무 반들거려서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미끄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습니다. 얼굴에 열기가 확 끼쳐 오르며 다시 땀이 나기 시작했고 좀 어지러웠어요. 오른쪽 귀가 먹먹해지면서 숨이 갑갑해져 왔습니다.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습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반년 내내 기다렸던 선생님과의 만남이 이런 식으로 끝나서는 안 되니까요. 지난 기다림의 시간도, 선생님과 함께 보낸 날들도 모조리 아무것도 아닌 게 되도록 그냥 놔둘 수는 없었습니다. 거기서 끝낼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핸드백에서 지칼을 꺼내 오른쪽 주머니에 넣고 왼손에는 책을 들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반겨 웃어준다면, 나는 조금쯤 쑥스러운 마음이 되어 책을 내밀겠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고 다정하게 물어봐준다면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받았다고 생각할게요. 그리고 당신 소설의 첫 장을 펼치겠습니다. 거기에 당신의 이름을 적어 넣는 것으로 우리 함께한 지난날에 아름다운 마무리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얌전히 돌아갈게요. 그러나 나를 보고 당황하거나 혹은 내 얼굴을 기억하지조차 못한다면, 왜 여기에 왔느냐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면 제 손은 주머니 속의 지칼을 쥐게 될 것입니다.

이제 고개를 들어 나를 보세요. 당신의 얼굴이, 당신이 지은 표정이, 당신이 나를 보고 떠올리는 감정이, 그다음 장면을, 내가 할 행동을 결정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책을 내밀게 될지 지칼을 내밀게 될지는 오로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한겨레출판 문학웹진한판 바로가기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최정화의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많이 본 기사

전체

정치

사회

경제

지난주

광고

트위터 실시간글

bjchina123 RT @badromance65 : 국민 수신료 받는 KBS, ‘일베’ 기자 결국 임용 http://t.co/ds93Rpk4mr1일 정식 임용…KBS 기자협회와 노조 즉각 반발회사 관계자 “법률 검토했으나 임용 취소 힘들어”이러다 친일도 모자라 …

EuiQKIM RT @qfarmm : [포토]42년 만에 최악 가뭄···위성사진으로 본 소양강댐 http://t.co/BMpS2UjVoq http://t.co/r4OxEINQ1z

LAST_Korea RT @cjkcsek : [사설] ‘어린이 밥그릇’까지 종북 딱지 붙이나 홍준표의 유치한 종북몰이는 자신의 ‘저질 정치인’ 면모만 부각시키며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http://t.co/XxOwP51oyK

idoritwo RT @parkjj35 : [한겨레] “할머니들도 ‘기껏 1번 찍어줬더니 아그들 밥값 가지고…’ 성토”http://t.co/ukHxPKTNnm[오마이] 홍준표, '해외골프' 뒤 첫 출근길에 비난 펼침막http://t.co/xn…

HillhumIna RT @jmseek21 : 국민 수신료 받는 KBS, ‘일베’ 기자 결국 임용 1일 정식 임용…KBS 기자협회와 노조 즉각 반발회사 관계자 “법률 검토했으나 임용 취소 힘들어” http://t.co/whlFjwWSl9

CbalsZotto 보궐선거용 거짓 립서비스~ “ @shreka3880 : ‘세월호 피해자 가족’ 챙기기 나선 새누리당 http://t.co/tfkk6gGEci 세월호 진상조사나 방해나 하자말라”

cess0 RT @badromance65 : 국민 수신료 받는 KBS, ‘일베’ 기자 결국 임용 http://t.co/ds93Rpk4mr1일 정식 임용…KBS 기자협회와 노조 즉각 반발회사 관계자 “법률 검토했으나 임용 취소 힘들어”이러다 친일도 모자라 …

idoritwo RT @parkjj35 : [한겨레]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는 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할까요.http://t.co/RyPp5DzeRr[미디어오늘] 유가족들 우려가 현실이 됐다http://t.co/coAAtDbtRQ

sookpoet RT @badromance65 : 국민 수신료 받는 KBS, ‘일베’ 기자 결국 임용 http://t.co/ds93Rpk4mr1일 정식 임용…KBS 기자협회와 노조 즉각 반발회사 관계자 “법률 검토했으나 임용 취소 힘들어”이러다 친일도 모자라 …

idoritwo RT @parkjj35 : [한겨레] 헌재 ‘김영란법’ 헌법소원 심리키로http://t.co/UMzV2bA4hY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