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 소설 <2화>
민아가 몰고 온 차는 흰색 SUV였다. 자동차에 문외한인 내 눈에는 꽤 비싸 보이는 차종이었다. 차의 뒷좌석에는 아이용 시트가 실려 있었다. 차 안에서는, 민아가 결혼한 지 6년 만에 어렵게 낳았다는 아이의 분 냄새가 났다. 차에 올라타서 우리는 반갑다며 다시 한번 인사를 주고받았다. 나는 민아의 외모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인 듯했다.
민아는 시동을 걸고, “먼 길 오느라 배고프지?” 하더니 나를 위해 챙겨왔다는 바나나를 건넸다. 바나나가 멸종할지도 모른다는 뉴스를 들었다며, 멸종하기 전에 많이 먹어둬야 한다고, 자못 진지한 말투로 이야기해 나를 웃겼다. 민아는 자주색 헝겊 장바구니도 내게 건넸는데 안을 보니 유리병에 든 무화과 잼과 매실 청이 들어 있었다. “내가 직접 담근 건데, 너 주려고 싸왔다. 설탕 많이 안 넣었으니 양껏 먹어.” 과육이 보이는 무화과 잼과 시중에 파는 것보다 색이나 농도가 훨씬 진한 매실 청이었다. 뭔가 따뜻하고 간지러운 것이 옷 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이 들어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괜히 “야, 이건 내가 목포 갔을 때 줘도 되잖아”라고 말했다. “아, 그러네. 내가 요새 정신이 이렇다. 너도 애를 낳아봐라.” 나는 민아가 건네준 무화과 잼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았다. 새벽부터 장거리를 이동한 탓에 피곤했지만, 친구가 지난밤 긴 시간 저어가며 만들었다는 잼은 달콤했다. 오길 잘했어. 친구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며 그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동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창문 틈으로 바람이 조금씩 들어왔다. 창밖으로, 계절과 어울리지 않게 새파란 파밭이 빠르게 지나갔다. 거의 10년 만에 찾은 해남의 풍경은 낯선 듯 익숙했다. 민아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 하는 서정적인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외로웠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송이 이 자리에 함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우리가 해남에 처음 방문한 것은 대학 졸업을 앞둔 즈음이었다. 그해 나와 민아는 졸업이 예정되어 있었고, 송은 휴학을 했던 탓에 아직 몇 학기를 더 남겨두고 있었다. 우리만의 여행을 계획했을 때, 해남행을 제안한 사람은 송이었다. 아무래도 이유는 땅끝마을 때문이었다. 우리는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떠나고 싶었고, 그 시절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 바로 땅끝마을이었다.
성격도 외모도 서로 판이했던 우리가 친해진 이유는 대학 시절 문학 동아리 활동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문학 동아리라는 종(種) 자체가 멸절했지만 그 시절에도 문학 동아리에 가입하는 신입생은 극히 드물었다. 동기가 동아리 내에 셋밖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히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동아리의 일이라고는 별것이 없었고 시나 소설을 써서 문집을 엮는 것 정도가 선배들이 중시하는 사업이었다. 취미가 독서라는 단순한 이유로 문학 동아리에 가입해 억지로 소설이나 시를 지어냈던 민아나 나와 달리 송은 진지하게 소설을 썼다. 나는 제목만 들어봤을 뿐이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안나 카레니나》 같은 소설들을 송이 고등학교 때 읽었다고 말해서 주눅이 들었던 기억도 있었다. 도대체 그런 책을 어떻게 읽을 엄두를 낸 거야, 하고 언젠가 물었더니 송은 대수롭지 않은 듯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돌았어서, 라고 답했다.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 편이라 송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알 길은 없었다. 송이 간혹 했던 말들을 종합해, 수유리 쪽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왔고 아버지가 고등학교 시절 즈음 돌아가신 것이 아닐까 짐작해볼 수 있을 뿐이었다. 식성이 까다롭지 않은 송은 유난히 치킨을 싫어했는데, 아무래도 송이 자라온 환경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송의 식구가 통닭집을 했던 것은 아닐까, 신입생일 때였나, 그 이듬해였나, 송은 없고 민아와 둘만 있던 언젠가, 올리브유에 튀겼다지만 올리브유 향은 나지 않던 치킨을 뜯으며 추측해본 적이 있었다. 서울의 변두리,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상호도 변변치 않은 허름한 통닭집에서, 몇 번이나 재사용한 기름이 들러붙어 끈끈해진 플라스틱 의자에 교복 차림으로 앉아 톨스토이를 펴놓고 읽는 송. 멋대로 그런 상상을 하는 일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인지도 그때는 미처 모른 채, 나는 그런 송을 그려보며 함부로 짠한 기분을 느꼈다. 무표정일 때는 제법 차가워 보여 친해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사실 송은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순진하지 않았다면, 비웃음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비가 많이 오던 날 두 평 남짓한 동아리 방에서, 소주병 안에 핀 곰팡이 꽃을 보다가 송은 민아와 나에게 말했다. 비밀을 털어놓듯이.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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