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 소설 <4화>
우리는 미황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주차장에는 비수기라 그런지 차가 없었다. 미황사는 10년 전쯤 해남에 왔을 때 교통편이 불편해 우리가 미처 둘러보지 못한 절이었다. “네가 차를 가진 덕분에 여기도 결국 왔네.” 절의 입구에서 우리는 신라 경덕왕 8년, 인도에서 온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던 소가 누운 자리에 의조 스님이 이 절을 지었다는 설화를 읽었다. 절은 아담했다. 담벼락 가까이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다. 아무도 따지 않는지, 꽃봉오리같이 환한 감들이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려 있었다. 사찰 뒤로는 달마산 자락이 펼쳐져 있었다. 민아는 점퍼 주머니에서 꺼낸 카메라로 절의 곳곳을 담았다. 민아의 얇은 점퍼가 바람에 둥실, 낙하산처럼 부풀어 올랐다.
“저쪽에 좀 가서 서봐.”
나는 약간 어색한 몸짓을 하며 민아의 카메라 앞에 섰다. 잎이 마구 떨어졌다. 샛노란 은행잎이. 민아가 내게 모양이 반듯하고 표면이 매끄러운 은행잎을 하나 건넸다. 나는 은행잎을 수첩 사이에 고이 끼워 넣었다. 우리는 민아의 카메라로 우리의 얼굴을 담았다. 화면 속에 두 명이 전부 다 들어올 때까지 찍는 일은 쉽지 않았다. 둘 중 하나가 자꾸 앵글 밖으로 벗어나거나 한 명의 얼굴이 자꾸 잘렸다.
미황사를 다 돌아보고 난 뒤 민아가 달마산을 산책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을 때 나는 사실 처음부터 탐탁지 않았다. 등산은 원래 우리의 계획에 없었고, 나는 컨버스화를 신고 있었다. 그렇지만 미황사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작았고 민아는 좀 아쉬운 기색이었다. “제시간에 내려와 땅끝에서 일몰을 볼 수 있을까?” 내 말에 민아는 등산로가 있다는 표지판을 보았다는 말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올라갔다가 금방 내려오면 되지.”
민아가 앞서고, 그 뒤를 내가 따랐다. 표지판에 그려진 길을 따라 걷고 있었지만 기대했던 것 같은 등산로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길이 생각보다 좁았고, 바닥이 울퉁불퉁했다. 산악회가 지나갔다는 흔적의 빛바랜 리본들이 나뭇가지마다 묶여 바람에 을씨년스럽게 흔들렸다.
나는 올라갈수록 발목이 걱정되었다. 민아는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는지 저만치 계속 앞장서갔다.
“근데 너 인세나 원고료는 얼마나 받니?”
빠른 속도로 걸어가던 민아는 불현 듯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나는 민아의 말투가 전혀 공격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약간 당황했다. 내 설명을 들은 민아는 “그걸로 먹고살 수는 있니?” 하고 또 물었다. 민아가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근데 너 시집 언제 가서 애 낳을 거야? 결혼 안 하면 삶을 반도 모르는 건데 좋은 글을 쓸 수 있겠어?”
민아는 늘 이런 식이었다.
나는 부러진 나뭇가지들을 밟았다. 민아는 옛날에도 퍽 고집이 세고, 무신경한 면이 있는 데다, 제멋대로였다. 잊고 살았는데 그러고 보면 민아와 나는 예전부터 여러 가지 면에서 종종 부딪치곤 했다. 우리가 별것도 아닌 걸로 다투거나 토라질 때마다 어른스럽게, 중재자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은 송이었다. 재수를 한 탓에 송이 우리보다 한 살 많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정 형편이 비슷한 민아나 나와 달리 송이 일찍부터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왔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송은 끊임없이 휴학을 했고 그 탓에 우리는 수업을 같이 듣거나, 공강 시간에 밥을 함께 먹은 기억이 별로 없었다. 송이 휴학하고 아르바이트하던 학원 앞에 찾아가 셋이 생일 파티를 했던 기억은 있었다. 그 학기, 송은 평일에는 영등포 쪽 보습 학원에서 단과반 영어 강사로 일했고 주말에는 정릉 쪽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송의 생일이었던 토요일, 우리는 송을 깜짝 놀라게 해주기 위해 케이크를 사 들고 무작정 정릉을 찾았다. 낡은 학원 외벽에 번개 모양의 금이 크게 그어져 있어 놀랐던 기억. 입구에서 송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더운 날씨에 생크림이 상해버리면 어쩌지, 안절부절못했던 기억. 학원 근처에 마땅한 식당이 없어서 결국 간판도 없는 삼겹살집의 철제 원형 테이블 위에 케이크를 올려놓았다. 5인분을 시켜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던 신기한 삼겹살을 땀을 뻘뻘 흘리며 굽고, 또 굽고서, 우리는 계절과 상관없이 키위와 포도, 딸기가 올라간 케이크에 초를 붙였다. “축하 노래 부를까?” 축하 노래도 불렀다. 언제나 피로해 보였던 송의 얼굴이 촛불 뒤에서 아주 잠깐, 환하게 빛났던 것 같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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