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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1.05 09:30 수정 : 2015.01.05 09:30

백수린 소설 <길 위의 친구들> ⓒ이현경



백수린 소설 <5화>



우리는 계속, 계속 비탈을 올라갔다. 길은 좁고, 딱히 갈라지는 데도 없이 이어졌다. 길의 양옆은 난폭하게 자란 풀과 덤불로 에워싸였다. 돌멩이를 디딜 때마다 신발 밑창이 얇아 발바닥이 아팠다. 아직 시간이 일러 해가 하늘에 걸려 있었지만, 나무들의 키가 너무 높아 사위는 갈수록 어둑어둑해졌다. 밤이 일찍 찾아오는 계절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땅끝에 도착할 수는 있는 걸까.

“슬슬 돌아가는 게 어때?”

앞서 걷는 민아를 향해 소리쳤다.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 나올 것 같은데? 여기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잖아.”

민아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나뭇가지들에 가려 아무것도 내려다볼 수 없기는 했다. 조금만 더 올라가보지, 뭐. 어쨌거나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거였고, 나는 친구와 별것도 아닌 일로 충돌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해남에서 일출과 일몰을 보고 싶어 하던 사람은 송이었다.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대. 근사하지?” 송이 그토록 신나하던 모습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 시작. 끝. 그런 유의 단어들에 겁도 없이 매혹을 느끼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

가도 가도 민아가 원하던 정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공기의 감촉이 바뀌고 어둠의 결이 촘촘해지기 시작할 무렵, 어디선가 푸드덕,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이건?”

내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새가 아닐까?”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민아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새라고? 민아는 그렇게 믿는 것 같았다. 새라면 하늘로 날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소리는 분명히 아주 낮은 곳에서 들려왔다. 햇빛이 닿지 않은 그곳에는 거뭇거뭇한 잡풀들이 어둠 속에 뒤엉켜 있었다.

길은 계속 어디론가 이어졌다. 비탈은 가팔랐다가 다시 완만해지기를 반복했다. 민아의 뒤통수만 바라보며 허덕허덕 뒤쫓는 동안 이정표가 간간이 나타났지만 제대로 가고 있는 중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일몰을 보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더 어두워지기 전에는 산 밑으로 내려가야 하는 게 아닐까. 기분 탓인지 공기도 점점 서느레졌다. 가야 할 길에서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는 빛이 잘 통과하지 않았다. 불안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볼 때마다 나는 무엇인가 위험한 것, 알 수 없고 치명적인 것이 어둠 속에 두 눈을 부릅뜬 채 웅크리고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때 또다시 푸드덕,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너무 놀라 입 밖으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민아가 놀란 듯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내려가자, 쫌.”

나는 주저앉은 채로 민아를 올려다보았다. 목소리에는 나도 모르게 짜증이 배어 있었다.

비탈을 내려오면서 우리는 둘 다 말이 없었다. 꽤 많이 올라간 줄 알았는데 내려오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생각만큼 높이 올라간 게 아니었던 거다. 등산로의 초입에서는 누군가가 밟았는지 감이 터져 들큼하고 떫은 내가 진동했다. 우리는 라디오도 틀지 않은 채 그냥 달렸다. 노면이 고르지 않아 차가 움직일 때마다 발밑에 내려놓은 장바구니 속 유리병들이 서로 부딪혀 자꾸만 덜그럭, 요란한 소리가 났다. 민아는 입을 앙다문 채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신경이 곤두섰다. 해가 지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일몰을 땅끝에서 보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서글펐다. 땅끝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사라져 있었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땅끝은 기억과 달랐다. 우리는 예전에 묵었던 민박집을 찾아 헤맸지만 아무래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자리에는 횟집이 들어서 있었다. “하는 수 없지, 일단 저녁을 먹자.” 저녁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진이 빠졌고, 우리는 그냥 음식점 옆의 커다란 모텔에서 묵기로 결정했다. 손님이 별로 없는지 조용한 모텔 내에서는 나프탈렌과 담배 냄새가 풍겼다. 나는 피곤이 몰려와 빨리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방은 작았고 킹사이즈 침대가 방 안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민아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침대 시트를 살피고, 화장실 안에 들어가 위생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못하다는 표정으로 침대의 가장자리에 앉아서 “이런 데서 묵는 거 진짜 오랜만이다”라고 탄식조로 말했다. 서랍장 위에는 초록색 모기약과 모르는 사람의 머리카락이 붙어 있는 플라스틱 빗이 놓여 있었다. 나는 내가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이불을 끌어당겨 천이 해진 시트를 얼른 감췄다.

우리는 굉장히 어색한 얼굴을 하고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소주라도 사올까, 뭔가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말을 꺼내려는데 민아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응, 응, 여보. 연두는 재웠어?” 전화를 걸 남편도, 재웠는지 확인할 아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없이 구형 텔레비전의 플러그를 찾아 콘센트에 꽂고 텔레비전을 켰다. 파밧, 소리와 함께 화면에 불빛이 들어왔고, 텔레비전에서는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이 흘러나왔지만, 나는 좀처럼 프로그램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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