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 소설 <6화>
밤새 뒤척였는데, 가까스로 잠들었다 생각하고 나서 눈을 뜨니 해가 솟은 지 한참 후였다. 민아는 일어나 침대 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이번에도 일출은 보지 못했다. 수첩 갈피 안의 은행잎은 바스러져 있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마을은 고요했다.
우리는 짐을 챙겨 모텔을 나왔다. 밝은 빛에서 보니 민아의 차는 어딘지 마을과 어울리지 않았다. 우리는 아침 겸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의 아무 식당에나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앉은 뒤 냅킨을 접어 상대방 앞에 깔고 수저를 탁탁, 챙겨놓고 컵에 물을 따랐다. 우리를 감싸는 냉랭한 공기가 신경 쓰였다. 이럴 거면 여행은 왜 함께 오자고 한 거야. 나는 주인아주머니가 석쇠에 구워준 생선을 발라 먹다가 용기를 냈다. “전망대에 올랐다가 땅끝탑에 갈까?” 땅끝 전망대에 오르는 방법은 모노레일을 타는 것과 걸어가는 것이 있었다. 의도한 것보다 내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들려 살짝 당황했는데 민아가 “이번에는 모노레일을 타자” 웃으며 답했다. 민아 나름 화해의 제스처였다. “아니야, 걸어가도 돼.” 이번에는 내가 웃었다.
오래전, 우리가 아직 셋이었을 때, 우리는 두 차례 땅끝 전망대에 오르려고 시도했다. 한 번은 일몰을 보기 위해서였고, 또 한 번은 다음 날 일출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셋이 걸었던 그 길을 이번에는 둘이 말없이 걸었다. 어제처럼 묵묵히, 앞에는 민아가, 그 뒤에는 내가. 오른쪽으로는 산, 왼쪽에는 바다. 커다란 배낭을 멘 사내들이 우리를 앞질러 지나갔다. 영원을 맹세하는 연인들의 이름이 새겨진 자물쇠가 철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땀이 났다. 바람이 불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겨우 도착한 전망대 앞에는 예전처럼 벤치가 있었다. 우리는 전망대 앞에서 바다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아직 어렸을 때, 세상에 대해 두려운 것이 지금보다는 적었을 때, 지켜야 할 것보다는 우리를 지켜줄 것이 조금 더 많았을 때, 셋이 같은 방향을 향해 앉아 있다고 믿었던 그 벤치에 앉아서. 둥근 태양이 솟았다가, 다시 가라앉는 자리. 시작과 끝이 맞물려 있는 땅. 날이 맑으면 한라산 꼭대기까지 보인다는 전망대에는 굳이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아득하게 멀었다.
그해, 우리는 일몰을 보는 데는 성공했지만 끝내 전망대에서 일출을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날 새벽의 일을 나는 잊지 않았다. 새벽인 데다 켜진 외등마저 없어 깜깜했던 골목의 풍경을. 골목 어디에서인가 들려왔던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그때 기억나니?”
벤치에 앉아 내가 물었다.
“그럼 기억하지.”
민아가 답했다.
그날 새벽, 우리는 추위에 떨며 어두운 골목을 걸었다. “돌아갈까?” 누군가가 말했고 “아냐, 그래도 이왕 나왔는데, 일출을 봐야지” 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민아와 나는 겁이 나서 손을 꼭 잡았다. 송도 무서운 게 틀림없었지만 먼저 가자고 말을 꺼낸 사람이라 책임감을 느꼈는지 무섭지 않은 척 앞장을 섰다. 우리는 결국 전망대에는 다다르지 못했다. 땅끝탑에도 도착하지 못했다. 전망대로 향하는 계단에 도착하기도 전에 해가 뜨려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길 위에 멈춰 서서 바다 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날이 너무 추웠다.
“그때, 사라지더니 빈 박스를 몇 개 주워왔잖아.”
민아가 아련한 말투로 말했다.
그랬다. 기다리고 있으라며 어디론가 사라졌던 송이 빈 박스를 주워왔다. 해가 곧 뜰 듯이 사위가 점차 밝아왔고, 송은 종이 상자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바람이 불어 불은 붙을 듯 붙을 듯 붙지 않았다. “이제 관둬. 곧 해가 뜰 것 같으니 하늘이나 봐.” 민아가 송의 팔을 끌어당겼다. 내가 민아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그때, 해가 수평선 위로 솟고, 불이 타닥, 타닥 소리를 내면서 간신히 옮겨붙었다.
“그 박스에서 비린내가 엄청 났잖아.”
생선이라도 담겨 있었던지 불이 붙은 박스에서는 비린내가 진동했다. 바람에 날리던 불똥이, 우주 가장자리의 외딴 별 위로 고요히 내리는 풋눈처럼 반짝였다. 우리의 얼굴 위로 치솟던 불길. 뜨겁고, 아름답고, 비릿했던 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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