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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1.08 09:27 수정 : 2015.01.08 09:27

백수린 소설 <8화>


땅끝탑에서 민아의 차가 세워진 선착장까지 이어지는 바다는 서쪽으로 기운 햇살에 소금밭처럼 빛났다. 바닷가에는 한쪽 어깨만 닳은 배들. 선착장 근처 시멘트 바닥 위, 누군가가 깔아놓은 군청색 방수포 위에서 은빛 멸치가 반짝이며 말라가고 있었다. 우리는 다음 일정에 대한 계획이 없었다. 아직 보지 못한 유적지를 둘러보아도 되었고, 아니면 간단히 이른 저녁을 먹고 해남을 떠나도 되었다. 우리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 고속버스 한 대가 선착장으로 들어섰다. 선착장 입구, 간이 판매대에는 보길도행 표를 판다고 적혀 있었다.

“섬에 갈래?”

민아가 물었다.

“배는 타기 싫어.”

내가 말했다.

“그지?”

민아가 말했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해면은 틀림없이 아름다웠다. 낙엽같이 빨갛고 노란 점퍼를 입은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이 새하얀 배 안으로 자꾸자꾸 들어갔다.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람들처럼. 이상하게도 가슴이 먹먹해와 우리는 노아의 방주에 올라타는 짐승들처럼 쌍쌍이 갑판 위에 오르는 이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차 안에 앉아 각자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수확이 끝나 텅 빈 들판 위로 드문드문 인적이 없는 민박집들이 서 있었다. 언뜻 바람에 휘청거리는 나무를 본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나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인가가 끝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붙잡을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러자 나는 별안간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언젠가부터 시시로 나를 갉아먹던 두려움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충동. 무엇인가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순결하고 깨끗했던 것이 산산이 조각나버린 것만 같아 소스라치게 놀라야 했던 시간들. 무정하고 불가해한 일로 가득한 것이 삶임을 깨닫고 순식간에 늙어버렸다고 느꼈던 계절들에 대해서. 그러나 나는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먼저 침묵을 깨뜨린 쪽은 민아였다.

“몇 해 전, 언젠가, 카보 다 로카에 실제로 가보려고 포르투갈에 간 적이 있었어.”

민아의 목소리는 해저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듯 잠겨 있었다.

민아가, 카보 다 로카에?

“싸구려 호텔에 묵었는데, 왜 머릿기름 냄새가 막 하수구에서 나는 그런 호텔, 혹시 알아?”

민아는 대답을 기다리며 운전하고 있었고, 나는 그런 호텔을 상상할 수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보 다 로카가 보고 싶어서 수중의 돈을 털어 비행기 표를 끊고 몇 시간을 날아갔는데, 잠이 계속 쏟아지는 거야. 이틀을 꼬박 그냥 호텔에서 잤어.”

나는 옆에 앉은 민아를 보았으나 민아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흘째 되는 날,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일어나서 사흘 만에 씻고 나갈 준비를 했어. 머리도 빗고 화장도 하고. 막 나갈 참이었는데 유럽에는 무료 공중화장실이 없다는 게 하필 그때 떠오르지 뭐야. 화장실에 들렀다 나가야겠다 싶어 가방을 문 앞에 놓고 화장실에 갔어. 근데, 볼일을 보고 밖으로 나오려는데, 갑자기 문이 안 열리는 거 있지.”

민아는 웃긴 이야기를 하려는 듯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나도 민아를 따라 웃었다.

“문을 잡아 흔들고, 몸으로 밀려고 해도 화장실 문이 안 열려. 처음에는 금방 열릴 줄 알았는데, 아무리 문을 흔들어도 열리지 않으니까 점점 무서워지더라고.”

민아의 목소리가 점차 심각해졌다. 나는 무릎 위를 덮고 있는 스웨터의 까끌까끌한 부분을 손끝으로 훑었다.

“나는 화장실에 혼자 갇혀 있고, 누구도 내가 여기에 갇혀 있는지 모르는데, 대체 언제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전화기만 있었어도 어딘가에 연락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필 휴대전화도 밖에 두고 온 가방 속에 있었어.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렀는데도 아무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어. 바깥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문을 두드리는데, 팔이 막 아픈데, 별것 아닌 걸 알면서도 막 무서워져. 침착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서운 거야. 유럽의 화장실은 욕실과 분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거든. 창고같이 좁은 공간에 변기 하나밖에 없고 창문도 없는 그런 화장실 말야.”

무슨 무슨 상회, 무슨 무슨 이발소 따위의 간판이 달린 단층 건물들이 우리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개가 컹, 컹, 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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