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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1.09 09:23 수정 : 2015.01.09 09:23

백수린 소설 <9화>



“근데, 처음엔 나가고만 싶더니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갇혀 있을지 모르겠으니까 침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질식하면 안 되니까, 너무 흥분하지 말아야겠다, 그래도 물은 있으니까 어찌 돼도 한동안 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근데 말야, 화장실 전등에 센서가 달려 있어서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전등의 불이 자꾸 꺼졌어. 불이 꺼지면 사방이 정말 깜깜해졌어. 완벽히 깜깜한 거 말이야. 완벽히.”

민아는 완벽히, 라는 부사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불빛을 만들기 위해, 일어났다가 다시 변기 위에 주저앉고, 일어났다가, 다시, 주저앉고.”

어두워질 때마다 다급하게 벌떡 일어나는 민아의 작은 몸이 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민아의 부서질 것처럼 작은 몸.

“그러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나. 이렇게 자꾸 불이 켜졌다, 꺼졌다 자꾸 반복하다가, 전구가 나가버리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전구에 불이 들어올 거라는 기약도 없이 내가 이 안에서 버틸 수 있을까. 그래서 그때부터는 불이 꺼져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전구의 필라멘트가 빨리 닳아버리면 안 되니까. 근데 참 이상하지,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지니까 오히려 마음이 진정되더라. 어쩌면 오늘 오후, 아니면 내일이라도 청소하는 사람이 들어오겠지 하는 생각이 들고, 무엇보다 차라리 여기에서 이렇게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나는 놀라 민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응,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화장실의 변기 위에 주저앉아서, 한 사람밖에는 들어오지 못하는, 관처럼 좁고 기다란 화장실 문 밑 미세한 틈으로 조금씩 들어오는 그 빛을 보면서. 해가 지면 저 빛마저 사라지겠지, 생각하면서. 저 빛이 사라지는 속도만큼, 천천히,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고, 그냥 이대로 조금씩, 조금씩, 아무도 모르게 이렇게 죽어가면 좋겠다고.”

짧은 침묵.

“어둠 속에 그렇게, 변기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내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복도의 소음이 들려와. 어떤 사람들이 큰 소리를 내며 포르투갈어로 대화를 했어.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는 소리. 본능적으로, 누군가가 내 방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어.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 문을 두드렸어. 포르투갈어를 모르니까 막, 영어로, 한국어로, 나도 모르게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소리를 쳐.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여자가 화장실 문을 잡아당기고, 열리지 않자, 뭐라고 말하고, 어떤 남자가 오고, 문을 다시 흔들고, 영어로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또 반나절은 더 걸리고, 일요일이라 수리공을 불러오는 시간이 좀 걸린다고 내게 사과를 하고. 그러고 나서, 한참 만에 결국 문이 열렸는데, 사람들이 나를 에워싸고, 괜찮으냐고, 물어보는데, 울음이 왈칵 쏟아졌어. 이제는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 나를 에워싼 사람들이 영어로 말했어. 그런데 나는 자꾸 울음이 쏟아졌어.”

민아는 말을 마치고 입을 다물었다. 민아는 살아서 다행이라,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 울었던 것일까. 아니면 다시 살아가야 하는 게 무서워서 울었던 것일까. 우리 주변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옆에 앉아 있는 민아를 바라보았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말할 때마다 고통스럽게 흔들리던 민아의 얼굴을. 밝고, 과장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당당하지만 언젠가는 누군가가 휘두른 폭력을 감내한 적 있었을 것도 같은 사람의 얼굴을. 나는 무엇이든 민아를 향해 말을 건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는 것이 적절한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 무릎 끝을 응시한 채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황금빛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들이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창밖으로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차를 세워봐.”

민아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창밖으로 바다 위에서 커다란 해가 지고 있었다. 햇빛 탓에, 바다 쪽을 향한 민아의 비스듬한 옆얼굴 주위로 반투명해 보이는 빛무리가 생겼다. 빛 속에서 나는 핸들을 쥐고 있는 민아의 손을 좇았다. 햇살이 어른거리는 민아 손의 손톱은 바투 깎여 있었다. 나는 약간 안심했다. 그리고 삶은 돌이킬 수 없는 것, 지나가버린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여행이 끝나면 우리도 완벽한 타인이 되어버릴지 모른다고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처럼, 인생의 어느 한 점 교차한 적 없는 사람들처럼, 언젠가는 우리가 그렇게 서로에게서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민아의 손톱은 짧았고 그러니까 민아가 혹여나 악몽을 꾸더라도, 그녀의 손바닥에는 상흔 같은 손톱자국이 새겨질 일은 없을 것이었다. 나는 어디엔가 떠 있을지도 모르는 유리병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 병이 이곳에 닿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혹은 카보다 로카에. 사방을 금빛으로 물들이며 커다란 해가 장엄하게 두 개의 바위 사이로 몸을 숙이는 모습을 우리는 1차선 도로 위에 차를 세워놓은 채 바라보았다. 잠시만 더. 어차피 다른 차가 뒤에서 쫓아와 빨리 가라고 경적을 울리면 우리는 다시 달려야만 할 것이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나의 무심함으로 인해 지켜내지 못한 모든 것들을 생각했다. 눈부시도록 찬란한 햇살이 우리가 타고 있는 차를 부드러운 파도처럼 집어삼켰다.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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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백수린의 <길 위의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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