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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용의 막전막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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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32
‘무엇’은 있지만 ‘어떻게’가 없어…‘정치인’ 아닌 ‘통치자’의 담화
DJ의 ‘제2 건국’처럼 퇴임과 함께 사라질 ‘창조경제’ 브랜드 집착
‘4대 개혁’ 이미 실기했지만 여·야 끈기있게 협상하면 가능할수도
박근혜 대통령이 6일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취임 이후 네번째 담화라고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 모두가 한 배를 타고 있는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으로 경제 재도약을 위해 힘을 모아 주실 것을 간곡히 요청 드린다”며 ‘4대 구조 개혁’을 다짐했습니다. 노동 개혁, 공공부문 개혁, 교육 개혁, 금융 시스템 개혁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4대 구조 개혁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데 담화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습니다.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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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6일 청와대에서 ‘경제 재도약을 위해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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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설득-공감-지지’ 과정의 생략…반발만 키워 아무튼 열린우리당 4대 개혁 입법은 국가보안법, 언론 관계법, 사립학교법, 과거사 규명법을 말합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4대 개혁 입법에 결과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천정배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언론 관계법은 열린우리당 원안에 포함됐던 핵심 내용이 대부분 완화된 가운데 개정됐습니다. 사립학교법은 여당이 강행 처리 했지만 한나라당의 강한 저항에 부닥친 노무현 대통령이 재개정을 지시해 재개정됐습니다. 4대 개혁 입법 가운데 그런대로 성과를 낸 부문은 과거사 규명법 정도입니다. 왜 실패했을까요? 지금은 새누리당의 정책통 국회의원으로 잘 알려진 나성린 의원이 당시 한양대 교수 이름으로 신문에 칼럼을 쓴 일이 있습니다.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선 서두르지 말고 철저히 준비해야 하고, 전문가들의 공감대를 얻어야 하고, 그 다음에 언론, 즉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하고, 마지막으로 개혁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집단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옳은 얘기입니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려운 이유가 바로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2004년 열린우리당은 개혁을 추진하면서 너무 거칠었습니다. 4대 개혁 입법으로 밥그릇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기득권 세력과 그 주변 인사들을 모두 적으로 만드는 오류를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실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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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표(앞줄 가운데)를 비롯한 한나라당 지도부와 부산·울산·경남 지역 의원, 사학·종교단체 회원 등 5천여명이 부산역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개정 사립학교법의 무효화를 요구하고 있다. 부산/국회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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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대신 예고 없이 전격적으로 ‘행동’했기 때문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내 사조직 하나회 숙청을 말로 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1993년 3월8일 하나회 출신 김진영 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을 전격 경질했습니다. 다음날 청와대 비서관 회의에서 그는 씩 웃으며 “모두 깜짝 놀랬제?”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위공직자 재산공개도 그랬고, 금융실명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늘 개혁을 전격적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개혁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반대를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개혁을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밀어붙였습니다. 만약 김영삼 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의 4대 개혁 입법을 추진했다면 어떤 방식으로 했을까요? 아마 말로 하지 않고 전격적으로 실행에 옮겼을 것 같습니다. 김대중 정부에서도 금융, 기업, 노동, 공공의 4대 개혁이 있었습니다. 사상 초유의 외환위기 와중에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4대 개혁을 추진하면서 수많은 직장인들을 거리로 내몰고 자영업자들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개혁 그 자체는 상당한 성과를 낸 것으로 평가됩니다. 아무튼 4대 구조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를 들으면서 개혁을 추진했던 과거 정권의 사례와 자꾸 비교를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실행되지 않는 개혁은 의미가 없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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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한 수석비서관들이 6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발표를 선 자세로 듣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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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사과나 롯데 등 재벌 개혁 의지 안보여 간절함과 곡진함만으로는 백성들의 참상을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는데도 현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대비’의 아둔함을 비꼬는 글로 저는 해석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가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국민들과의 공감을 통해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세우지 못한 간절함과 곡진함은 공허할 수 있다는 점만 지적하고 싶습니다. 둘째, 담화에 국민들과 국회의 협조를 구하는 당부와 지시는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인 자신이 앞으로 뭘 하겠다는 구체적인 방안은 거의 없었습니다. 메르스 사태에 대한 사과도 없었고, 롯데가의 경영권 분쟁으로 드러난 재벌의 소유구조에 대한 개혁 의지도 없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직도 자신을 초월적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셋째, 비슷한 얘기지만 ‘무엇을’만 있고 ‘어떻게’가 없었습니다. 정치는 ‘무엇을’도 중요하지만 ‘어떻게’를 만들어내는 기술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는 ‘통치자’의 담화이지 ‘정치인’의 담화로 보기 어렵습니다. 넷째, 창조경제는 있지만 경제민주화는 없었습니다. 담화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지금 세계 각국이 경제침체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저는 우리도 4대 개혁을 차질 없이 추진하고,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을 이루는 데에 경제도약의 해답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개인의 창의성과 능력을 바탕으로 한 창조경제는 전 세계가 공감하는 경제적 대안이자 희망입니다.” “저는 창조경제를 통해 우리나라의 경제부흥을 일으켜서 선진 대한민국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들으며 박근혜 대통령이 ‘창조경제’라는 자신의 브랜드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종료와 함께 사라질 창조경제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제2 건국을 추진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혁신을 추진했지만 지금 제2 건국과 혁신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임기 5년의 대통령이 역사에 남을 의제를 설정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데도 우리 대통령들은 왜 이렇게 자신의 브랜드를 역사책에 남기려고 애쓰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박 대통령의 ‘4대 개혁’이 성공하기 어렵다?
열린우리당의 ‘말’은 있지만, YS의 ‘행동’은 없어 차라리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경제민주화를 강하게 추진했더라면 박근혜 대통령의 업적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경제민주화는 시대정신이었고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임기 절반을 지나기도 전에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는 흔적도 없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박근혜 대통령의 4대 구조 개혁이 성공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나라 경제를 살리고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꼭 필요한 개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대와 전망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박근혜 대통령의 4대 구조 개혁이 성공하기 어렵다고 전망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시기가 너무 늦었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 초기 정치적 동력이 살아 있을 때 4대 구조 개혁을 전격적으로 밀어붙였다면 성공 확률이 높았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3년차의 힘없는 대통령으로 추락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나성린 의원이 열린우리당의 4대 개혁 입법에 대해 지적했듯이 박근혜 대통령이 시간을 갖고 이해 당사자들을 설득해 가며 서서히 개혁을 추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시피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은 이해 당사자나 국민들을 설득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거의 하지 않는 이상한 대통령입니다. 청와대 비서관들에게 하는 지시사항을 온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특이한 대통령입니다. 야당 의원들은 물론이고 야당 지도부도 좀처럼 만나지 않는 독특한 대통령입니다. 그래도 개혁 과제를 섣불리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국회와 여야 정당에 그나마 기대를 걸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와 새정치민주연합의 문재인 대표는 공무원연금법 개정이라는 성과를 만들어낸 경험이 있습니다. 여야 국회의원들이 이번에도 끈기를 갖고 협상에 임해서 4대 구조 개혁 과제 가운데 한 두 가지라도 합의를 도출해 주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말입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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