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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린 버그퀴스트 미국 네바다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 사진 강태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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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한국입양아 출신 사회복지 전문가 자숙 버그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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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도 한국 아이 입양해 요리사로
같은 입양아 오빠도 한국 아이 입양 “양부모 애정 받으며 자라 기쁘지만
고향 전통·문화·정체성 잃어 슬퍼”
‘세계 고아의 날 제정’ 국제포럼 발표 지난달 말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김동수 노퍽주립대 명예교수와 함께 한시간 남짓 그를 만났다. 지난 2005년 은퇴한 김 교수는 노퍽주립대 은사로서 캐슬린의 석사학위 논문 지도교수이기도 하다. 목회학, 사회사업학 등을 전공하고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김 교수 역시 아동 문제 및 사회복지의 소명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교수는 평화운동가이자 시인, 수필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두 사제는 이날 사회복지법인 숭실공생복지재단이 주최한 고위 전문가 포럼에서 나란히 발표를 맡았다. 이 포럼에서는 ‘대안적 보호가 필요한 아동’을 위한 유엔 세계 고아의 날 제정 등 다양한 논의들과 함께 그 필요성을 담은 서울선언이 채택됐고 이를 추진하기 위한 100인 위원회 발족식도 있었다. 김 교수는 고아의 권리 및 복지의 관점에서 ‘미국 등 한국 고아들의 국제 입양 문제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라는 주제에 초점을 두고 발표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해외입양은 한국의 만성적 사회문제, 즉 원하지 않는 아이, 방치된 아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쉽고 값싼 수단으로 기능했다”며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동들은 그들의 고향을 떠나서 외국으로 이주하지 않고 친족 돌봄, 국내 입양, 후원과 실현 가능한 가정위탁을 통해 보호받도록 해야 한다.” 바로 이런 고아 문제에 관한 한 버그퀴스트만 한 전문가는 드물 것이다. 그는 이름과 달리 한눈에 봐도 아시안이다. 올해 53살의 한국계 미국인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입양아이자, 한국 아이를 입양한 입양부모이기도 하다. 그는 1963년, 20개월 된 아이 때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 백인 가정에 입양됐다. 3살 때 입양한 그의 딸은 지금 28살의 어엿한 성인으로 자라 셰프(요리사)가 됐다. 그가 20년 이상 해왔던 자신의 일을 ‘영광’으로 표현한 건 이런 사연 때문일지도 모른다. 버그퀴스트는 이날 발표에서 “학문적 견해가 아닌 개인적 생각을 나누려는 걸 용서하길 바란다”면서 자신이 ‘국제적 아동복지제도의 산물’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백인 미국인 가정에서 애정과 은혜를 받으며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기쁜 일이지만, 내가 태어난 고향의 전통과 문화,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은 슬픈 일이다.” 그는 생부모가 지어준 것으로 추정되는 ‘자숙’이라는 이름과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것 말고는 한국에 대한 기억이 없다.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도 모른다. “입양기관인 홀트에 화재가 나는 바람에 자료가 불에 타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한국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 그가 쓴 많은 논문과 책의 색인을 보면 반드시 저자 이름은 ‘버그퀴스트, 케이. 제이. 에스(K. J. S)’로 표기돼 있다. 케이는 캐슬린, 제이 에스는 자숙이다. 또한 그가 쓴 책과 논문들 역시 그의 삶이 자신의 정체성 찾기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2007년 공저로 낸 <한국인의 국제적 입양-정책과 현실의 50년 역사>를 비롯해 ‘한국인 입양공동체의 진화-그 모든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가?’ ‘아시아인들의 국제적 입양-아이들의 이익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고 있는가?’ ‘아시아인들의 디아스포라(이산) 연구 개념의 확대-한국 입양아들의 이주민적인 경험들’ 등이 그렇다. 그의 입양부모는 ‘자숙’ 말고도 또 다른 한국인 남자아이를 입양했다. 캐슬린은 6개월 먼저 난 ‘동갑내기 오빠’와 함께 컸다. 미국인으로 자란 오빠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기 너와 비슷한 애가 간다.” 훗날 오빠도 한국인 아이를 입양했다. 그러고 나선 달라졌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정서적 유대감 같은 걸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드라마나 노래, 어떤 것에서 정서적 동질감을 느끼는지 물었다. “춤을 못 춘다. 그런데도 한국의 전통춤을 보면 몸이 움직인다. 한류는 잘 모른다.” 그는 자라면서 우리말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을 많이 아쉬워했다. 강태호 선임기자 kankan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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