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1.04 18:58
수정 : 2015.01.09 14:32
[짬] 장기수 리인모 노인 양아들 김상원 씨
“동생 현옥이를 한번만이라도 더 만나고 싶어요. 그게 어렵다면 소식이라도 주고받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1993년 북한으로 돌아간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2007년 작고)씨의 ‘양아들’ 김상원(74)씨는 4일 “내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느냐”며 북에 있는 리씨의 친딸 리현옥(66)씨를 꼭 한번만이라도 다시 만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91년 1월부터 93년 3월까지 리인모씨를 경남 김해시 진영읍 자신의 집에서 모시고 살았다. 두 사람의 ‘부자 인연’은 우연히, 그러나 운명적으로 이뤄졌다.
“91년 초 <한겨레>에 난 비전향 장기수 관련 기사와 후원금 모금 광고를 봤어요. 그들이 남한에서 살 곳조차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지요. 6·25전쟁이 끝난 것이 언젠데 아직도 남한에 포로가 있다니. 전쟁포로 대우에 관한 국제협약인 제네바협정에 어긋나는 것은 물론 인간적인 도리도 아니잖아요.”
김씨는 즉시 서울의 비전향 장기수 후원회 사무실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경기도 과천의 한 양로원에 머물던 리인모 노인을 소개받았다.
1991년 ‘한겨레’ 보고 후원회 방문
리인모씨 본 순간 모시기로 결심
“중학생 두 아들과 지내며 한가족으로”
2001년 평양서 재회했으나 ‘혼수상태’
2004년 인천 방문한 딸 현옥씨 만나
“아버지가 ‘술 좀 그만 마셔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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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 장기수 리인모 노인의 양아들인 김상원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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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처음 만났을 때 어르신은 양로원의 다른 노인들에게 ‘빨갱이’라며 매일같이 구타를 당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더군요. 처음 보는 순간 그분을 모시고 살기로 결심했죠”라고 말했다. 그는 리씨에게 “나를 아들이라, 우리 애들을 손자라 생각하고 야단치며 지내세요. 한달 지내보고 편하시면 계속 계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돌아가신 뒤 통일이 되면 유품까지 북의 가족에게 전해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김씨와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부인 이필주씨 사이에는 2남2녀의 자녀가 있다. 리씨는 당시 중학교 1·2학년생이던 김씨의 두 아들과 한 방에서 생활하며, 아이들을 친손자같이 아꼈다. 낮에 아이들이 학교 가고 없을 때는 라디오를 들으며 아이들을 기다렸다.
김씨는 리씨를 모셔온 직후 경기도 과천경찰서와 수원지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두 기관은 모두 김씨를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큰 짐을 덜었다”며 고마워했다. 하지만 김씨 집엔 경찰과 안기부(국정원) 요원들이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집 앞에 있는 집안 제실 ‘월파정’의 방 한칸씩을 경찰과 안기부에 내줬다. 경찰과 안기부 요원들은 월파정에서 먹고 자며 24시간 감시했다.
리씨와의 생활이 익숙해진 어느 날 김씨는 왜 전향하지 않았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리씨는 “그런 것은 묻는 것이 아니야”라며 호통을 쳤다. 김씨는 “40여년 지켜온 새싹 같은 순결을 그대로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는 묻지 않았다”고 말했다.
리씨는 34년에 걸친 수감생활로 건강을 잃은 상태였다. 91년 7월16일 뇌출혈로 쓰러져 부산대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그해 9월1일 퇴원했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리씨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북한 당국은 그의 북송을 우리 정부에 요구하기 시작했다. 92년 5월5~8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제7차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렸다. 김씨는 북쪽 대표인 연형묵 총리에게 리씨를 넘겨줄 생각으로 그해 5월1일 “바람 쐬러 가자”며 리씨를 승용차에 태워 집을 나섰다. 경찰과 안기부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해 강원도와 충청도 일대를 돌아다니다 5월7일 아침 9시 신라호텔 진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호텔 입구에서 붙잡혀, 회담이 끝난 뒤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리씨는 갖가지 질환으로 반복해서 병원을 드나들었다. 93년 2월 해운대해수욕장을 다녀온 직후엔 폐농증으로 부산대병원에 입원했다. 매일 아침 등에 주사를 찔러 고름을 빼내야 했다. 입원 중 북송이 결정됐고, 그해 3월19일 부인과 딸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김씨는 판문점에서 그와 이별했다. 김씨는 2001년 방북해 그를 찾아갔으나, 마침 의식을 잃고 병원에 입원한 상태라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 리씨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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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상원 씨, 리인모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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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6월15일 인천에서 ‘6·15 공동선언 발표 4돌 기념 우리민족대회’가 열렸다. 리씨의 딸 현옥씨가 북쪽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했다. 김씨는 인천에서 현옥씨를 만났다. 현옥씨는 “아버지가 ‘남쪽에 가면 오빠를 꼭 만나 이 말을 전해주라’고 하셨어요”라며 전했다. “술 좀 그만 마셔라.”
김씨는 “함께 살 때 단 한번도 ‘아버지’나 ‘아들’이라고 서로를 부른 일이 없는데, 지나고 보니 아버지같이, 아들같이 서로 의지하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지금도 김해시 진영읍에 살고 있는 김씨는 중풍과 신부전증 등 여러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죽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리씨의 북쪽 가족을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리인모씨는 1917년 함경남도 풍산에서 태어나, 50년 한국전쟁 때 인민군 문화부 소속 종군기자로 낙동강전선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52년 1월 지리산 대성골에서 포로가 돼 7년 형을 선고받고 59년 1월 만기출소했으나, 5·16 군사쿠데타 직후인 61년 6월 재수감돼 88년 10월까지 모두 34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사상을 버리지 않고 버티다 93년 3월19일 북으로 돌아갔고, 2007년 6월16일 숨졌다.
김해/글·사진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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