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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2.23 19:03 수정 : 2015.12.23 22:00

정종성씨. 사진 임종업 기자

[짬] 헌책방 ‘대양서점’ 주인 정종성씨

지난 21일 서울 홍제동 유진상가 건너편 헌책방 대양서점이 오랜만에 붐볐다. 40년 가까이 이어온 헌책방이 올해 말로 문을 닫는다는 소문이 번지면서 옛 손님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전남 고흥에 사는 사진가 최종규씨도 다녀가고 소설가 오인문씨, 조경가 김인수씨 등이 와서 주인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초등생 아들과 함께 온 젊은 아버지가 동화책 몇 권을 뽑았다. 주인은 “한 권에 1천원씩”이라면서도 웬만한 것은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이렇게 문을 닫는 줄 알았더라면 좀더 자주 올걸 그랬다”는 게 이들의 이구동성이었다. 주인 정종성(73·사진)씨는 시원하다고 말하지만 대화 틈틈이 서점을 둘러보는 눈길에 회한이 어렸다.

폐결핵 앓아 법원공무원 그만두고
1979년 미아리 뒷골목서 개업
85년 복덕방하려다 홍제동으로 옮겨

“90년대 전성기…요샌 한권도 안팔려”
올연말 36년만에 간판 내리기로
2000년 아들 독립개업해 대물림

“저도 늙어가고 손님도 늙어가더군요. 단골들 발길이 끊기면 신상에 무슨 일이 있구나 하고 짐작하죠. 하나둘 그렇게 사라지더군요.” 4~5년 전부터 손님과 책의 들고 남이 뜸해지고 주인장이 케이블 텔레비전을 지켜보며 시간을 죽이는 날이 늘어갔다. 손때가 묻은 금고 옆에 케이블채널 번호와 방송사 이름이 적힌 메모지가 붙어 있다. “요즘은 기억력이 예전만 같지 않아서 적어놓지 않으면 안 됩디다.” 쪽지가 붙은 그 자리엔 원래 단골손님들의 전화번호와 학교별 교과서와 참고서 목록이 있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책을 거의 보지 않습니다. 학교 교육 자체가 독서를 권장하지 않거든요.” 그는 90년대 헌책 동호인들이 책방을 돌며 책을 수집하던 때가 마지막 전성기였다고 회고했다.

그가 헌책방 동아서림을 차리기는 1979년. 미아리 롯데백화점 뒤쪽, 고물상과 술집들 사이사이에 박힌 헌책방 가운데 하나였다. 법무부 공무원이던 그는 폐결핵을 앓아 오랫동안 휴직을 해야 했다. 치료 때문에 가산이 점점 기울고 아이들은 커가자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 헌책방이다. 당시 헌책방 두 곳을 하던 이한테서 하나를 인수했다고 했다. “80년대 미아리는 변두리여서 못사는 사람들이 살았어요. 헌책방이 잘될 수밖에 없었죠. 아이들 교과서, 전과는 없어서 못 팔았어요. 정석수학은 장별로 분철한 것들도 사 갔어요.” 고물상에서 들어오는 책을 묶어놓으면 청계천, 장안평, 인사동 헌책방에서 바로바로 실어 갔다고 했다. 그에게 헌책은 텍스트가 아니고 무게와 부피였다. 고물상에서 산 값에 얼마간 이문을 붙여 도심의 2차 헌책방에 넘겼다. “워낙 싸게 넘기니 하루에도 몇 팀이 와서 책을 실어 갔어요.”

대양서점이란 상호는 1985년 홍제동 간호전문대학 앞으로 옮기면서 자신의 고향인 경남 합천군 대양면에서 따왔다. 6년 동안의 미아리 시절을 청산하고 부동산 중개로 전직을 하려고 자리를 물색하다 결국 다시 헌책방으로 돌아섰다고 했다. “당시 평창동 사람들이 강남의 아파트로 대거 이주했어요. 책과 물건을 많이 버리고 갔지요. 단독주택은 물건을 쌓아둘 수 있지만 아파트는 그럴 수 없잖아요. 그곳 사람들이 지식인 중산층이어서 버리고 간 물건도 좋은 편이었어요. 미아리와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났어요.” 그는 “아침이면 고물장수들이 떼로 몰려갔다”며 “운이 좋으면 괜찮은 책과 골동품을 만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기서도 학생들이 줄을 섰어요. 고물상이 여럿 있고 학교 앞이면 헌책방이 있었지요.” 한번 단골인 사람은 꾸준히 찾았다. 광화문 공씨책방 주인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어느 해 여름비가 갠 날, 전화가 왔어요. 신세 진 일이 많으니 점심을 사겠다고요.” 그들은 냉면을 함께 먹었고, 공씨는 논문집 몇 권을 싸들고 나갔다.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버스 안에서 쓰러져 운전사가 파출소에 내려두고 갔다고 해요. 같은 책장사로 면목이 없었어요. 어쨌든 우리 집에 들렀다가 타계했으니까요.”

199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고가도로 옆, 항상 그늘져 임대료가 싼 반면 유동인구가 많아서다. 장성한 아들 태영씨가 헌책방을 하겠다고 했다. 2000년 겨울 큰길에서 하나 들어간 골목길에 대양2서점을 냈다. 새 헌책들 가운데 시, 소설, 수필, 종교서적, 실용서를 남기고 나머지 ‘똘똘한’ 책은 아들한테 넘겼다. 아버지 손님 역시 자연스럽게 아들 서점으로 넘겨졌다. 아들은 젊은 손님을 새로 끌어들이고 인터넷을 활용해 전국으로 책을 팔았다. 몇년 뒤 아들은 ‘기억 속의 서가’라는 간판을 달고 독립해 나갔다. 그때부터 아버지가 설교 테이프를 듣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오토바이 사고가 나면서 다리를 다친 것도 그 무렵이다. “요추 협착증이랍니다. 잠을 잘 못 잘 정도로 아파요.” 오랫동안 책짐을 나르느라 무리를 한데다 사고 후유증이 겹친 탓이다.

“최근 몇년 책방 임대료도 안 나왔어요. 한 권도 못 판 날이 이어졌어요.” ‘대기업’ 알라딘에서 전국적으로 헌책방 체인을 내면서 시난고난 시들던 헌책방들은 결정타를 받았다.

보람도 있었다. “우리 책방에서 헌 참고서를 사서 공부한 신일고 3학년생이 서울대 수석합격을 했어요. 내 일처럼 기뻤어요. 손님들한테 서울대 수석을 배출한 책방이라고 자랑을 했지요.” 어엿한 어른이 되어 자녀들과 함께 찾아와 인사할 때도 헛산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헌책방이라는 게 하루 종일 좁은 자리를 지켜야 하잖아요. 이제 오랜 감옥살이에서 놓여난 기분이에요.” 말은 그렇지만 그는 아들 책방 일을 거들게 되지 않을까 싶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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