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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동(앞줄 가운데) 전 광주대 교수가 제자들과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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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침략사 ‘국제적 충돌’로 살펴
한반도 외부세력 움직임에 비중 자유언론운동 하다 ‘동아’서 해직
언론사 저술 활동으로 옥살이도
‘일본의 중국 침략사’도 집필중 박 교수는 “여러 학자·교수분들이 땀 흘려 탐색·수집·정리해 놓은 서책과 도해자료들을 해설·전달하는 ‘기자의 역할’에 그쳤다”며 자신을 낮췄지만 책에는 방대한 자료들을 선별·정리해 재구성한 그만의 시각, 역사관이 짙게 녹아 있다. 각 권마다 참고, 인용한 책들 수십권의 목록을 따로 정리해 놓았고, 본문 중에도 인용한 자료 출처를 밝혀 놓았다. 이 책 외에 <한국언론사상사> <한국언론 실증사>, <진실인식과 논술방법> 등 여러 책을 쓴 그는 이들 책 때문에 다섯 차례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붙잡혀 가 고생했다. “한국 언론의 역사를 저술하면서 박정희의 일제시대 관동군 장교 행적 등을 처음으로 공개하기도 했는데, 아마도 그 때문에 나를 그렇게 엮어넣었을 것입니다.” 1990년대 중반에 대학 교재로 쓴 <진실인식과 논술방법> 역시 이적표현물로 찍혔다.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는 데 무려 10년이 걸렸어요. 퇴직금도 그때서야 다 받을 수 있었죠.” 강원도 양양이 고향인 “가난뱅이 강원도 감자바위” 박 교수는 “대학 공부를 위해 서울로 왔는데 돈이 없어서 처음엔 학비 무료인 항공대에 들어갔다가 자유당 시절의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을 체험하고는 느낀 바가 있어 적성에 맞지 않는 항공대를 그만두고, 역시 학비가 가장 쌌던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1962년에 들어갔다”고 했다. 한-일 회담 반대 시위에 나섰다가 무기정학을 당해 1년간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던 그는 1967년 졸업과 함께 동아일보사에 들어갔고 해직 당시엔 외신부(국제부) 기자였다. 해직 뒤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고생했던 그가 번역일과 학원강사 등으로 생계를 어렵게 꾸려갈 때 외신기자 시절 익혔던 영어가 큰 도움이 됐다. 그때 당한 고초가 지긋지긋했던지, “분단과 전쟁도 식민지배 탓이다. 일본은 그렇게 우리를 국토뿐만 아니라 경제·사상적으로 분열시켰다. 미국과 함께”라는 얘기를 하면서도 “표현을 부드럽게 해달라.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겁난다”고 했다. 지금 그는 ‘중국이 일본에 침략당한 역사’에 관한 원고도 거의 다 써 놓았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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