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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희 박사는 여수와 순천에서도 여순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적었다. 해방 뒤 좌우익 갈등이 심했고 여순 사건 이후엔 사적 보복으로 민간인 피해자가 많이 나온 순천 지역이 진실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에 소극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엔 여순사건 순천유족회가 왕성히 활동하고 있어 고무적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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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여순사건 다뤄 박사 따
같은해 여순 왜곡 다룬 저술도 최근 책에서 “사건 아닌 항쟁”
“제주민 학살 거부 우발적 봉기
정부 아닌 병사들 입장에서 봐야” 봉기군에게 ‘수도 점령 목표’나 ‘치밀한 사전 계획’도 없었다면서 이 역시 반란으로 보기 힘든 요인이라고 했다. 학계 통설은 아니지만 군이나 보수 우익 진영에선 ‘남로당 지령에 의한 반란’이라고 주장한다. “지금 학계의 통설은 지창수 특무상사 중심으로 40명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사건 초기만 해도 장교인 김지회 중위가 총지휘자로 지목됐으나 67년 군이 펴낸 책 <한국전쟁사1: 해방과 건군>이 나오면서 갑자기 지 상사가 주도 인물이 됐죠.” 그는 남로당 지령으로 지방 좌익과 좌익 군이 힘을 합쳐 반란을 일으켰다고 몰기 위해 의도적으로 광주 출신 하사관인 지창수를 등장시켰다고 했다. 이런 군의 주장을 학계가 제대로 검증·비판하지 못하면서 통설이 됐다고도 했다. “당시 장교는 남로당 중앙당부 소속이어서 지방 좌익들과 교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또 지역 출신 하사관이 연고지에서 병사를 모집했어요.” 그는 여순사건 이후 군 조사나 언론 보도, 빨치산 자료 등에 지창수란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면서 김 중위를 총지휘자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결론지었다. “남로당 중앙이나 도당부의 결정 없이, 부대 안 좌익 세력이 제주도 출동이라는 급박한 상황을 맞아 우발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봐야 합니다.” 그는 뒤늦게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 “제가 활동한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98년 여순사건 50주기 행사를 열었어요. 이때부터 여순사건이 지역사회에서 회자되기 시작했어요.” 노무현 정부 때 설치된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여순사건 구례지역 피해자 조사를 책임졌다. “진실화해위 활동을 하면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맘먹었죠.” 마흔이 넘어 순천대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를 땄고, 박사는 전북대에서 받았다. 그는 여순사건이 간첩조작이나 예술 활동 침해와 같은 국가폭력의 시발이 된 사건이라고도 했다. “이승만 정부는 사건 초기에 여순사건의 배후에 최능진 선생 등 혁명의용군 사건 관련자가 있다고 발표합니다. 혁명의용군 사건은 정부 수립 이후 터진 첫 간첩조작 사건입니다. 남인수가 부른 ‘여수야화’가 49년에 나왔는데 금지곡으로 묶였어요. 정부 수립 이후 첫 금지곡이죠. 여수가 불바다가 됐다는 내용이 민심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했죠.” 여수가 고향인 주 박사는 책에서 전남 동부지역 주민들이 여순사건으로 지역적 연좌제의 족쇄 속에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고 썼다. “고교 시절에 공부 잘하는 친구나 선배가 육사 진학을 원하는데 못 가는 경우를 여럿 봤어요.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연좌제가 적용됐다는 걸 알았어요. 어렸을 때 어머니한테 ‘나서지 마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요.” 이젠 여순사건을 이념투쟁의 도구가 아니라 역사로 봐야 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난 지역에서도 반공주의에 매몰된 왜곡된 시선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순사건 가해자의 80%가 군과 경찰입니다. 지역에 군과 경찰과 관련된 이익단체가 여럿 있어요. 결집력도 강하고 목소리도 크죠. 지역 정치인들은 이들 눈치를 보며 여순항쟁을 역사로 보지 않고 이념 투쟁으로 봅니다. 반면 진보단체는 민간인 학살 피해에 초점을 맞추죠.” 내년이 여순사건 70주년이다. “사건의 성격을 규명해 제대로 명명해야겠지요. 사건이라고만 하지 말고 연구를 토대로 반란인지 항쟁인지 제대로 써야 합니다. 정부나 군의 입장이 아닌, (봉기한) 군인들이나 지역민 입장에서 합당한 정명이 되어야 합니다. 70주년을 맞아 지역민이 여순항쟁을 제대로 기억해주고, 정확한 이름으로 불러주었으면 합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사진 주철희 박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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