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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4.23 12:05 수정 : 2018.04.23 20:56

지난 20일 저녁 경남 통영 전혁림미술관 전시장에서 소설가 김훈(왼쪽)이 봄날의책방 주최 북토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짬] '난중일기' 북토크 김훈 작가

지난 20일 저녁 경남 통영 전혁림미술관 전시장에서 소설가 김훈(왼쪽)이 봄날의책방 주최 북토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남해의 목포에서 부산까지 다니며 싸웠습니다. <난중일기>에는 대략 1200개의 인명과 200개의 지명이 나옵니다. 장군이 남해의 모든 섬과 포구, 작은 마을들을 몸으로 갈고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전쟁을 했다는 걸 이 숫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죠.”

지난 20일 저녁 경남 통영 봉수길 전혁림미술관 1층 전시장. 소설가 김훈이 100명 가까운 청중 앞에 나섰다. 미술관 이웃 건물인 출판사 남해의봄날과 자매 서점 봄날의책방이 주최하는 북토크에 초대된 것. ‘내 마음의 이순신’을 강연 주제로 삼은 김훈은 “제가 느낀 장군의 특징 몇가지를 <난중일기>에 근거해서 말씀 드리겠다”며 강연을 시작했다.

“우선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분이 얼마나 보고를 성실하게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항상 바다의 사실과 과학에 입각해서 전쟁을 했습니다. 가령 전쟁 첫날 그분이 임금에게 보낸 장계를 보면 정말 잘 짜여진 보고서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이순신은 자신이 받은 보고의 내용과 시각, 보고 주체, 그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확하고 꼼꼼하게 정리해서 임금에게 보냅니다. 전쟁 7년 동안 무수한 보고서를 임금에게 보냈는데, 그게 다 마찬가지였어요. 신문 기자의 보고보다 충실했습니다.”

적의 규모와 전쟁 상황뿐만 아니라 군대 내의 식량 사정에 대해서도 정확하고 꼼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청어 1만3240 두름을 말려서 곡식과 바꿨다거나, 부하가 겉곡식 한 되, 기름 다섯 되, 꿀 네 병을 군량으로 가져왔다는 식이다. 김훈은 “젊었을 때 이걸 보고 울었다. 구국의 영웅이 이런 문장을 쓰시는 데에서 군대의 형편을 알 수가 있었던 것”이라며 “동시에 사실에 입각한 정직성과 현실을 대하는 겸허함도 알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곳 통영은 한산대첩 승리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당시 소를 먹이던 김천손이라는 미천한 자가 지금 케이블카가 있는 미륵산 중턱에서 적선 70여척의 출현을 목격하고 이순신 장군이 계시던 고성까지 뛰어가서 보고를 했습니다. 김천손의 보고를 바탕으로 장군은 사실을 확인했고 결국 함대를 출동시켜 적을 섬멸시켰던 것이죠. 그런데 장군이 최초의 적선 출현을 목격한 김천손의 이름을 <난중일기>에 기록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통영 봄날의책방에서 독자와 대화
“엄격함·자상함 함께 갖춘 위대함”
지역·동네 서점 공동체적 가치 강조

마라톤의 유래를 떠오르게 하는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김훈은 “통영에서 고성까지, 김천손을 기념하는 마라톤 대회를 열어서 이름 없는 하층민의 애국심을 기리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다음으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순신 장군과 부하들의 관계에 대해서입니다. 장군은 전쟁 7년간 약 120번의 군법을 집행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신속하게 집행했어요. 전투에서 도망치거나 군량을 빼돌린 자, 민간인 마을의 개를 잡아먹은 자 등을 죄질에 따라 칼로 베어 죽이거나 매 40~50대를 때리도록 했죠. 그런 걸 보면 그리 너그럽거나 인자한 분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그런데 그와 정반대되는 성품도 볼 수 있습니다. 장군은 한산대첩에서 죽거나 다친 부하들의 이름과 신분을 하나도 빠짐없이 써서 임금에게 보냈어요. 그래서 저도 그들의 이름을 다 압니다. 이처럼 부하를 다룸에 있어 엄격성과 자상함이라는 극단의 모순을 하나의 인격에 통합할 수 있는 게 그분의 위대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시간에 걸친 강연이 끝난 뒤 참석한 청중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통영의 출판사·서점이 주관하는 행사임에도 통영뿐만 아니라 서울과 인천, 대구, 구리 등 전국 각지에서 온 독자들이 다양하고도 수준 높은 질문을 던졌다. ‘글을 쓸 때 어떤 게 영감을 주나’ 하는 질문에 대해 김훈은 “나는 노동의 힘으로 글을 쓴다. 나는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인데, 책보다는 사물과 사태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 하고 그것을 글로 쓰려 한다”고 답했다. 그는 또 “나는 지금도 언어와 관념을 맹신하는 자들을 혐오한다. 생활의 바탕, 삶의 구체성이라는 바탕이 없이 언어를 맹신하는 자들은 삶과 세계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고 단언했다.

지난 20일 저녁 경남 통영 서점 봄날의책방 주최로 전혁림미술관에서 열린 북토크에 참석한 소설가 김훈이 발언하고 있다.
강연과 질의응답을 합쳐 두시간 남짓한 북토크를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김훈은 지역 서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출판사 남해의봄날과 서점 봄날의책방은 지역의 작지만 훌륭한 문화 자산입니다. 온라인 서점을 이용하면 속도도 빠르고 많은 혜택도 받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동네 서점은 그런 가치를 뛰어넘습니다. 동네 서점은 지역의 소통과 네트워크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주민의 협조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남해의봄날에서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이라는 놀라운 글·그림 책을 냈는데, 서점 봄날의책방이 바로 그런 구멍가게입니다. 동네 서점이 자본에 포식 당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여러분이 잘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가 여기 온 목적은 이 마지막 말을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북토크를 주최한 봄날의책방의 정은영 대표는 “강연료도 마다하고 지역까지 내려와서 독자들과 진심으로 소통하신 김훈 작가님의 모습에 감동 받았다”며 “작가들의 이런 발걸음이 더 많아져서 지역의 독자들에게도 문화적 공감대가 더 깊어지고 넓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통영/글·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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