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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언영화연구소 한상언 소장. 사진 임종업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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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북한 영화’ 발견
“다양성과 활력 넘치던 장르”
70년대 ‘주체 선전도구화’로 쇠퇴 중·일 인터넷 뒤져 책 구해 연구
책 팔지 않는 ‘평양책방’ 전시도 한 소장의 관심은 25년 동안 북한에서 피어났다가 사라진 리얼리즘 영화 황금기를 복원하는 데로 모였다. 그 작업이 결실을 이뤄 <월북 영화인의 삶과 예술> 단행본 출간을 앞두고 있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은 낯설지만 알고 보면 친숙하다. 나운규와 함께 <아리랑>을 만든 주인규가 그 예다. 그는 북한의 초기 영화산업을 디자인했다. 한국전쟁 때 서울에 와 남쪽 영화인을 데려가기도 했다. 강홍식은 영화배우 최민수의 외할아버지다. 일제 강점기에 <유쾌한 시골영감> <처녀총각> 등을 부른 가수로 유명하다. 해방 뒤 북한의 국립영화촬영소 연출부 책임자가 됐다. 해방기 영화동맹 서기장이던 추민은 1946년 월북해 국립영화촬영소 부소장, 영화잡지 편집장 등을 지냈다. 윤용규 감독은 한국전 때 월북해 <소년 빨치산>, <빨치산의 처녀> 등을 찍었다.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 전>에 이름을 빌려준 김연실은 무성영화 시대의 여주인공이다. 영화배우 최은희의 시누이로,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북한에서 활동할 때 신필름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북한에서 영화는 최적의 선전수단입니다. 좋은 콘텐츠는 대부분 연극이나 다른 장르를 거쳐 마지막에 영화로 제작됐죠.” 한설야 단편소설 <승냥이>(1951)가 1956년 연극으로, 그 이듬해 영화로 만들어지는 식이다. <꽃 파는 처녀>는 애초 항일투쟁 현장에서 연희됐던 창극으로, 해방 뒤 목격자 구술을 토대로 재구성돼 가극과 영화로 만들어지고 소설로도 나왔다. 영화는 종합예술이다. 그가 당시 북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여러 장르의 책을 수집·참고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소장품 중 박태원의 <리순신 장군전>(1952), 김학철 옮김 고골 원작의 <검찰관>(1949), 이태준의 <조국의 자유와 세계평화를 위하여>(1951)는 국내 유일본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도서관의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서울대도서관 북한 자료와 함께 연구자한테 큰 도움이 될 듯하다. 통일부는 근년 연변에서 북한자료를 집중 구입했으며 서울대는 총련계 문학연구가 김학렬의 소장품 6천여권을 기증받은 바 있다. 북한 고서는 화가들이 장정을 한 게 특징이다. 출판사에 전속 화가가 있었으며 한설야와 같은 유명작가 책은 일류 화가를 붙였단다. <청춘기>(1958)는 정현웅, <탑>(1956)은 선우담, <설봉산>(1956)은 정관철, <성장>(1961)은 이건영(한국화가 청전 이상범의 아들), 배운성이 장정 또는 삽화를 맡았다. 박태원 <리순신 장군전>, <임진조국전쟁>(1960)은 그의 동생 박문원이 맡았다. 해방 전 <천변풍경>(1938)에 이은 형제 협업이다. 해방기 북한 최고 시인으로 꼽는 조기천의 시 선집 장정도 박문원 몫이었다. 단골도 생겼다. 박태원의 차남 박재영씨는 매일 출근하다시피 한다. “책을 보며 마치 아버지를 대하듯 하시더군요.” 박씨는 한 소장과 의기투합해 내년 박태원 탄생 11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한 소장은 관객들이 이런 자료를 어떻게 구입했는지 가장 궁금해하더라면서 중국과 일본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샀다고 했다. 한 권에 30만원 이상 들었다고도 했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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