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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7.25 21:26 수정 : 2018.07.26 18:09

[짬] ‘문익환 통일의 집’ 지킴이 사촌자매 문영금·영미씨

지난달 박물관으로 새로 문을 연 ‘문익환 통일의 집’ 문영금(왼쪽) 관장과 문영미(오른쪽) 이사 자매가 안방을 소개하고 있다. 액자 속 늦봄과 봄길 모습은 문익환 목사가 방북 사건으로 재수감돼 6번째 옥살이를 하고 풀려난 1993년 무렵으로, 마지막 부부 사진이 됐다. 김영수 작가가 찍었다. 사진 김경애 기자

“안타까움이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 기억해야 할 사람과 일들, 역사가 잊혀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늦봄·봄길 두 분 곁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인연으로, 그나마 더 늦기 전에 시작할수 있어서, 세상이 바뀌어서 다행이지요.”

지난달 1일 박물관으로 새로 문을 연 ‘문익환 통일의 집’의 문영금(오른쪽) 관장과 문영미(왼쪽) 이사는 약속이라도 한듯 똑같이 답을 했다. 2011년 늦봄 문익환 목사의 부인인 봄길 박용길 장로가 세상을 떠난 뒤 사실상 비어 있던 통일의 집을 두 사람이 7년만에 새 단장하고 ‘지킴이’를 자임하게 된 이유다.

지난 23일 서울 성북구 수유리 서민 주택가 골목에 자리한 통일의 집을 찾아갔을 때도 두 사람은 새달 8·15 기념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늦봄 문익환 목사 감방전-꿈은 가두지 못한다’를 위한 유품 촬영작업을 진행하느라 폭염을 잊고 있었다.

문익환·문동환 형제 목사의 딸들
2006년 증조부모 회고록도 함께 펴내
박용길 장로 별세 이후 ‘주인 잃은 집’
2015년부터 준비모임 꾸려 보존나서

지난달 ‘사설 박물관’으로 재개관 결실
“사료 2만5천점 수장고 없어 창고에”
이달말까지 1차 후원 모금 ‘도움 절실’

문익환·박용길 가족이 1970년 입주해 별세할 때까지 살았던 서울 수유리 통일의 집 대문에는 여전히 부부 이름을 나란히 적은 문패가 걸려 있다. ‘통일의 집’ 현판은 94년 늦봄 사별 뒤 봄길이 직접 이름 지어 쓴 글씨이고, 지난 6월1일 박물관으로 재개관하면서 앞쪽에 ‘문익환’ 글자를 집체해 써넣었다. 사진 김경애 기자

늦봄의 딸인 영금씨와 늦봄의 동생 문동환 목사의 딸인 영미씨는 사촌자매 사이다. 18살이나 차이가 나지만, 두 사람은 여러 아들 형제들을 대신해 ‘문씨 집안의 딸’로서 가족사를 정리하고 이런저런 대소사를 도맡아 챙겨왔다. 2006년 구한말 북간도 이주민 역사의 산증인인 할아버지 문재린과 할머니 김신묵의 회고록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삼인 펴냄)을 함께 썼다.

“근처에 살던 동환 삼촌네에서 혜림 숙모가 영미를 낳으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순간부터 기억하니까요. 이제는 서로 눈빛만 봐도 통하지요.”(문 관장) “딸이 귀한 편인 데다 공동체처럼 가까이 모여 산 덕분에, 어릴 때부터 큰아버지·큰어머니는 물론이고 사촌들한테도 귀염을 많이 받았어요. 74년 캐나다로 유학가서 결혼해 정착했던 언니(영금)가 89년 늦봄의 방북 파문을 계기로 영구 귀국을 하신 뒤로 더욱 든든한 의지가 됐고요.”(문 이사)

1960년대 지어진 상공부 집단주택으로 문익환 일가가 이주해온 것은 70년, 늦봄이 한신대에서 퇴임해 교수 사택을 나와 신구교공동성서번역 구약번역실장을 맡을 무렵이었다. 그뒤 75년 ‘친구’ 장준하의 의문사를 계기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뛰어든 늦봄이 94년 심장마비로 돌연 숨을 거둔 곳도 이 집의 안방이었다. 일본 유학시절 늦봄을 만나 44년 서울과 용정에서 두번의 결혼식을 올린 봄길은 ‘50돌 금혼식 기념 부부동반 전시회’ 약속을 저버린 채 늦봄이 홀연히 떠난 뒤 손수 붓글씨로 쓴 ‘통일의 집’ 간판을 내걸고 집을 공개했다. 2013년 서울시에서 ‘서울미래유산’으로 등록하긴 했지만 실질적인 지원은 전혀 없어, 주인 없는 통일의 집에는 먼지와 곰팡이만 쌓여갔다.

“원산 가는 철길이 보이는 동두천 소요산자락에 조부모 모신 선산 말고는 이 집이 유일한 유산이에요. 늦봄의 수인번호표부터 제가 한문 이름 쓰기 배울 때 보낸 엽서까지 봄길 숙모께서 워낙 꼼꼼하게 모아둔 까닭에 사료가 무려 2만5천점이나 됐어요. 2015년부터 준비모임을 꾸리긴 했는데 예산이며 일손이며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지요.”(문 이사)

그러다 연세대 사학과와 한신대 신학대학원 출신인 문 이사가 2013년부터 이한열기념관 학예연구실장을 지내며 박물관 등록과 유물보존 경험을 살려 돌파구를 찾게 됐다. “지속적인 보존과 관리를 위해서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박물관으로 등록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2016년 사단법인을 꾸려 추진을 했는데, 박물관 요건을 갖추기가 쉽지 않아 포기해야 했어요.”

공공 박물관으로 대중에 공개하려면 전문 인력 확보는 기본이고 수장고와 주차장 등 부대시설도 필수 요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8년 늦봄 탄생 100돌 때까지 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영금씨가 ‘박물관장’의 짐을 기꺼이 지고 나섰다. “맨위 언니는 어릴 적에, 두살 위 오빠(호근)도 2011년 먼저 떠나서 맏이가 됐어요. 손아래 남동생(의근·성근)들은 생업에 바쁘구요. 대학원에서 컴퓨터를 전공했지만 ‘컴맹’인 저라도 손을 보태기로 했지요.”

지난해 10월 뒤늦게나마 ‘문익환 탄생 100주년 기념 준비모임'이 출범하면서 두 사람은 다시 기운을 냈다. 박물관 건립 기금 크라우드펀딩을 열자, 무려 1008여명의 시민들이 십시일반 힘을 보탰고, 서울시에서도 올해 처음 1500만원의 가옥 수리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마침내 개관식에는 30평 남짓한 집을 둘러싸고 400여명의 축하객이 모여 한바탕 잔치도 즐겼다.

“지난 일년 내내 집안 구석구석 정리하면서 개인적인 감회와 보람은 물론이고, 새삼 소명 같은 걸 깨달았어요. 안방 장롱 바닥에서 ‘4·2 남북 공동선언문’ 원본과 94년 1월18일 쓰러지기 직전 새벽에 (남·북·해외 범민련 대표에게) 쓰신 ‘늦봄의 마지막 편지’를 발견했을 땐 특히 그랬어요. 이제 남북화해의 문이 다시 열렸으니, 앞서간 이들의 ‘통일의 꿈’을 알리고 전하는 교육의 장으로 통일의 집이 널리 쓰였으면 좋겠어요.”(문 관장)

“다만, 이름은 박물관이지만 사설이어서 모든 예산을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하는 게 진짜 과제예요. 1차 전시한 사료들 말고 한신대에 임시 보관해둔 2만5천점 분류작업부터 전문 학예사를 비롯한 상근 인력의 보수와 시설관리비 등 안전적인 운영기금 마련에 도움이 절실해요.”(문 이사)

통일의 집은 우선 이달 말까지 초기 개관기금(4억원 목표)을 모금한 뒤 9월15일 정기후원회원(CMS)과 10만원 이상 기부자의 이름을 새긴 ‘후원자의 벽’을 앞마당에 세워 동판제막식을 할 예정이다. 누리집(문익환.닷컴/main/index.html), 후원계좌 (우리은행 1005-003-075342 사단법인 통일의 집).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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