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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7.31 19:19 수정 : 2018.08.01 09:52

[짬] 추모 펼침막 만든 ‘종철이의 동지들’ 이준영·전상훈씨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 추모집회 때 그대로 복원한 ‘아버지의 펼침막’과 지난 28일 별세한 박정기 선생 추모를 위한 ‘아들의 펼침막’을 만든 ‘종철이의 동지들’ 전상훈(왼쪽)·이준영(오른쪽)씨가 30일 저녁 서울광장에서 함께 했다.
“종철아 잘 가그래이…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아부지, 많이 힘드셨지예. 인쟈부터 막내가 잘 모시겠습니더”

31일,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고 박정기 선생의 민주시민장이 열린 서울광장 제단에 내걸린 두 개의 펼침막이 눈길이 끌었다. 31년만에 ‘부자의 대화’를 연출한 주인공은 아들의 후배 전상훈(서울대 정치학과 85) 이지스커뮤니케이션 대표와 87년 첫번째 펼침막을 만들었던 이준영(고려대 사회학과 84) 장준하기념사업회 상임운영위원장이다.

박 열사의 직계후배는 아니지만 88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열사의 선후배들과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전 대표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두 개의 펼침막에 얽힌 사연을 공유했다.

87년 1월23일 9개대학 ‘박종철 추모집회’
고대생 이씨 ‘비폭력 투쟁’ 펼침막 제작
“박정기 아버님 ‘마지막 흐느낌’ 구호로”

박 열사 서울대 후배 전씨 ‘복원’ 제안
“아버님과 막내아들 재회 순간 떠올리며”
서울광장 민주시민장 제단에 나란히

1987년 1월24일치 <동아일보> 사회면에 실린 ‘박종철군 추모제’ 사진. 펼침막의 ‘종철아! 잘 가그래이…아부지는 아무 할말이 없대이’는 부친 박정기씨가 1월16일 아들의 유골을 임진강 지류 샛강에 뿌리면서 마지막으로 했던 흐느낌이었다.
첫번째 ‘아버지의 펼침막’은 박 열사의 죽음 열흘 뒤인 1987년 1월23일 고려대 정문 앞에 처음 등장했다. 서울동부지구 9개 대학 연합으로 열린 ‘박종철 추모집회’의 선두를 장식했다. 이 펼침막 사진은 1월24일치 <동아일보> 사회면에 실려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막내 아들을 고문으로 잃은 아버지의 피를 토하는 심경 ‘한마디’가 세상을 울렸습니다. 이 땅의 아비어미를 울렸고, 아들딸들을 울렸습니다.”

전 대표는 이 펼침막을 만든 주인공이 이준영 위원장이란 사실을 올 봄에야 뒤늦게 알게 됐다고 소개했다.

“87년 6월항쟁의 현장에서 함께 뛰었던 형을 30여년만에 만나 소주 한 잔을 나눈 자리였습니다. 박종철 추모집회 이야기를 하다가 형이 ‘그날 그 펼침막을 내가 붓을 들고 직접 썼다오’라고 털어놓았습니다.”

고 박정기 선생이 1987년 1월16일 겨울비 속에서 아들 박종철의 유골을 뿌렸던 임진강 지류 샛강에 이듬해 1주기를 맞아 다시 찾아 추모하는 모습. <한겨레> ‘길을 찾아서-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 (2011년 12월 26일치) 중에서.
이 위원장도 이날 박정기 선생에게 올리는 추모의 글에서 ‘펼침막 제작기’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1986년 10월 28일의 건대 항쟁은 수많은 구속자와 투쟁의 침체를 낳았다. 적(5공 정권)들의 탄압은 숨 쉬기도 어려운 폭압 그 자체였다.…적들의 오만은 결국 박종철을 죽음으로 몰았다. 야만의 시대였다. 우리는 적들의 살인행위에 항거해야 했다. 그러나 집회만 하면 학내로 진격하는 공권력의 공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서울지역 전체 집회가 안 되면 동부지구라도 하겠다고 선배들과 싸워서 이겼다. 그리고 집회 날이 잡혔다. 1987년 1월 23일 오후 2시.…집회 준비의 마지막은 플래카드 제작이었다. 후배들이 어떤 구호를 쓸지 물어왔다. 막막했다. 이럴 땐 혼자 술집에 가는 버릇이 있었다. 소주 한 병을 비웠을 때 며칠 전 <동아일보> 기사가 떠올랐다. 아버님의 흐느낌. 모든 것을 잃은 황망함과 공포와 분노였다.’

이 위원장은 이날 전화 인터뷰에서 “이제까지의 규탄성 투쟁 구호가 아닌, 아버님의 심경을 담은 감성 구호를 내건 까닭은 도덕적 우위를 통해 정권의 야만성을 폭로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고 했다.

박 열사와 직접적인 인연은 전혀 없었다는 그는 ‘84학번 동기의 죽음에 살아남은 자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싶다’는 마음이 통했다고 했다. “첫 추모집회에 예상을 뛰어넘는 1천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했지만 화염병이나 각목이나 짱돌은 없었고, 경찰도 이례적으로 지켜보기만 했어요. 덕분에 집회 열기가 고조되면서 집행부가 나서 계획에 없던 철야농성까지 이어졌으니까요.”

이 위원장은 ‘새로운 비폭력 침묵 투쟁방식으로 초토화됐던 학생운동권이 자신감을 회복하는 계기가 됐고, 이어 6·10항쟁으로 폭발하는 단초가 된 것 같다. 아버님의 구호가 민주진영을 회생시킨 선물이 됐다’고 덧붙였다.

지난 31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고 박정기 선생 민주시민장 제단 앞에 검정색과 흰색의 ‘부자의 대화’ 펼침막이 나란히 내걸렸다.
‘아버지의 검은 펼침막’을 부활시킨 것은 전 대표였다. “지난 28일 새벽 박정기 선생의 별세 소식을 듣고, 아버지와 아들이 31년 6개월만에 재회하는 길에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습니다. 우리 회사 20대 디자이너가 옛 사진을 보고 포토샵으로 복원해줬습니다.” ‘아들의 흰 펼침막’ 역시 전 대표의 창작이었다. “종철 형이 아버지를 만날 때 할 말을 생각했습니다. 부산의 벗들에게 사투리 자문을 구해 캘리그라피스트 신동욱 작가에게 글씨를 부탁했습니다.”

전 대표의 아이디어를 전해듣고 ‘제작비’를 보탰다는 이 위원장은 “아버님의 말씀을 허락도 구하지 않고 펼침막에 적어놓고, 여러 집회 때마다 뵈었지만 정작 죄송하다는 말씀 한번 못 드렸다”라며 뒤늦은 용서를 구했다.

전 날 서울광장에서 미리 만나 ‘부자의 대화 펼침막’을 내건 두 사람은 마지막 인사를 함께 올렸다. “우리의 아부지, 박정기님의 명복을 빕니다.

하늘에서 막내와 영원한 안식을 누리십시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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