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8.26 20:13
수정 : 2018.08.26 20:23
【짬】 원로 언론학자 김민환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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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 소설 <눈 속에 핀 꽃>을 낸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가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를 찾아 인터뷰에 앞서 사진을 찍고 있다. “퇴임 뒤 보길도에 간다고 하니 아내 반대가 심했어요. 3년 동안 보길도에 내려 오지도 않았어요. 지금은 아내가 보길도를 더 좋아합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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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언론학자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가 두 번째 소설 <눈 속에 핀 꽃>을 냈다. 2010년 정년 퇴임을 하고 3년 뒤 첫 소설 <담징>을 냈으니 5년 만의 후속작이다.
그는 목포 해양고 2학년 때 결핵 판정을 받았다. 그 뒤로 진학이나 취업 생각은 접고 오로지 죽음을 피할 길만 생각했다. 2년이 흘러 진학 결심을 하고 모교를 찾았다. 고3 담임이 조언했다. “신방과를 나와 기자를 하다가 네 글을 써라.” 구체적인 장래 희망을 갖게 된 순간이었다. 동기들보다 2년 늦게 들어간 고려대 신문방송학과에서 “기자가 돼 세상 공부를 한 뒤 소설을 쓰겠다”는 꿈을 키웠다. 뒤늦게 소설가 꿈은 이뤘지만 기자는 못 했다. 대신 공부를 더 해 언론학자가 됐다. 한국 언론사 연구의 권위자란 말도 들었다.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이번 책에 답이 있다. 대학에 들어간 1966년부터 대학원을 다니던 1972년까지가 소설의 시대 배경이다. 24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김 교수에게 ‘자전소설’이냐고 묻자 한술 더 떠 “자전적 실연 소설이죠. 새로운 장르입니다. 사실 대학을 다닐 때 연애를 해보지도 못했죠”라고 한다.
소설의 큰 줄기는 박정희의 3선 개헌과 종신 집권 기도에 맞선 고대 운동권 학생들의 저항이다. 그는 2학년 때 동기생인 천영세 전 민주노동당 대표, 이원보 노사발전재단 대표이사장, 이수언 전 국민일보 편집국장 등과 독서서클 한모임(한맥 전신)을 만들었다. 고대 운동권의 뿌리로 평가받는 단체다. 이 회원들은 6·8 부정선거 규탄 시위(1967년)와 3선 개헌 저지 투쟁(1969년)의 중심에 섰다. 김 교수가 모델인 주인공 영운은 67년 거리 시위에선 경찰봉에 머리가 찢겼고, 69년엔 성명서 문안을 직접 썼다. 국가원수 화형식 주도자로 몰려 정학 처분을 받았다. 기자의 꿈을 접은 이유다.
소설의 또 다른 줄기는 사랑이다. 영운은 서로 호감을 가졌던 윤희를 서클 친구가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고 친구에게 먼저 기회를 주자고 생각한다. 사랑의 인연이 빗겨 갔던 부잣집 출신 윤희는 뜻밖의 길로 나아간다. 빈민 사목에 나선 목회자 아내가 되어 평생 빈민의 벗으로 살아간 것이다.
왜 자전소설을? “아버지가 어릴 때 ‘장꾼보고 장에 가라’고 했어요. 장에 누구랑 가느냐가 중요하단 얘기죠. 좋지 않은 장꾼이랑 가면 야바위꾼을 만나 돈을 털릴 수도 있고 술만 먹고 싸울 수도 있죠. 좋은 사람이면 유용한 농사 정보들 얻기도 하죠.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대단한 신뢰가 있어요. 천영세 이원보 두 친구는 운동하기 위해 고대에 왔어요. 이원보는 중동고 야간을 나와 노동자와 구로동 야학 교사 생활을 한 뒤 고대에 들어왔죠. 80년대 저자 이름도 없이 나돌았던 불온서적 <한국노동운동사 서설>을 쓰기도 했어요. 이수언은 <부산일보> 해직기자로 통일 인사 200명을 인터뷰하기도 했죠. 대학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났어요.”
노동운동의 길로 직행한 천영세 이원보 두 친구와 달리 김 교수는 대학원을 택했다. “부채 의식이 커요. 대학원에 간다고 하자 둘이 강력히 노동판으로 가자고 했어요. ‘가난하게 살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산다’는 내 삶의 지표를 실현할 장이 바로 그곳이라고요.” 그럼 왜 대학원을? “결핵에 대한 공포가 컸죠. 낫긴 했지만 치료가 잘 된 것은 아니었어요. 격렬하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덧붙였다. “친구들은 노조 만들려고 죽을 고비도 겪으며 살았는데 나는 교수가 된 뒤 가끔 교수들 서명이나 받으면서 할 일 다했다고 살아도 되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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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가 최근 펴낸 <눈 속에 핀 꽃>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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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엔 빈자들의 벗이 되겠다는 영운의 생각이 윤희 등 대학 동기들한테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묘사된다. 김 교수는 가난한 사람들과의 동질 의식이 목포 해양고를 다닐 때 강해졌다고 했다. “가난한 학생들이 많았어요. 우수한 학생들도 많았고요. 방학 때도 다들 집에 가지 않고 학교에 남았죠. 대전 한밭중을 나온 한 친구가 여름에 하얀 양말을 신고 다니는 것을 보고 선배들이 여름에 웬 양말이냐며 물통을 씌우고 때리기도 했죠.”
친구 때문에 연애로 직진하지 못한 장면을 들추자 그는 지금 그 시절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했다. “(작중 인물 윤희와는) 편지 50통을 주고받았지만 사랑하는 말을 절제하는 단계였죠. 그때 전쟁통에 폭탄을 맞아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 손에 자란 친구가 자기도 좋아한다고 했어요. 트라우마가 큰 친구였어요.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컸죠.”
석사를 마친 뒤 지도교수는 미국 유학을 권했지만 그는 한국에 남았다. 당시 서클 모임에서 유학 얘기를 꺼냈다가 후배들의 격한 반발도 샀다. “당시는 유학을 갖다 오면 무조건 교수가 됐어요. 그래서 고민이 많았죠. 1992년 전남대에서 고대 교수로 옮겼을 때도 제가 (고대에서) 거의 유일한 국내파였죠. 1년 뒤에 역시 국내파인 고 황현산 교수가 고대로 왔어요. (광주민주화운동 때만 해도) 우리와 남의 편을 나눌 때 미국 유학 갔다 온 사람은 무조건 남의 편이었죠.”
유학을 포기한 아쉬움을 묻자 그는 89년 미국 미주리대 교환 교수로 갔던 얘기를 했다. “도서관을 24시간 내내 열고 책이 엄청 많더군요. 그때 ‘내가 거쳐야 할 과정을 빠뜨렸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하와이대의 논문 발표 제안에 영어 토론을 할 자신이 없어 응하지 못할 때도 그런 생각을 했죠.”
박정희 맞선 고대 운동권 소재로
최근 자전소설 ‘눈 속에 핀 꽃’ 내
퇴임 뒤 ‘담징’ 이어 두 번째 소설
고대 운동권 서클 뿌리 ‘한맥’ 1기
대학 때 이루지 못한 사랑 얘기도
“새 장르인 ‘자전적 실연 소설’이죠”
소설가가 꿈이었지만 교수 시절 소설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했단다. “운동권 출신 국내파로서 더 많은 연구 업적을 내야 한다는 맘이 컸어요.”
계획은? “근현대사를 돌아보면서 이데올로기란 뭔지, 이데올로기는 왜 폭력을 동반하는지를 묻는 소설을 써보고 싶어요.”
김 교수는 8년 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신문을 두고 앞잡이 언론이라며 싸잡아 비판했다. 정론보다는 정파성이 두드러진다는 의미다. 지금은 어떨까? 다소 뜻밖의 얘기를 했다. “앞잡이가 해체되고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요. 조중동도 이전과 달리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경향과 한겨레(의 논조)도 다르죠.” 그는 “박근혜가 몰락한 뒤 우파의 목소리도 분화했다”면서 지금의 여론 지형을 다원성이란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본다고 했다. “제가 평소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는 탄탄한 중산층 중심의 공론장을 강조했어요. 이런 공론장에선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같은 이가 튀어나와도 사회가 불안하지 않아요. 최근 우리 공론장을 보면 이런 목표에 조금 더 가까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운동권 출신인 그가 학자의 길을 걷게 된 데는 신방과 고 오주환 교수의 격려가 힘이 됐단다. “2학년 1학기 때 오 교수님의 한국언론사 강의를 들었어요. 시험 문제가 ‘일제하 민족지를 논하라’였어요. 한국 민족주의의 본질적 성격을 투쟁으로 보는 모범 답안과 달리 저는 중국과 인도, 한국의 민족운동를 비교한 뒤 한국과 중국 민족주의가 인도의 무장주의와는 달리 실용과 타협주의 성격이 강하다는 논지를 폈어요. 이 답안을 보고 오 교수께서 저를 주목하신 것 같아요. 해양고 출신에 수석 입학한 것도 영향이 있겠죠.”
동기생들과 다른 식견은 어디서 온 걸까? “고교를 졸업한 뒤 고향 장흥 집에서 책을 많이 봤어요. 당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초등학교 교사가 근처에 사셨는데 책이 많았어요. 언제든 와서 보라고 하셨죠. 그때 사상계에서 나온 ‘사상문고’를 다 읽었어요. 20권 정도 된 것 같아요.” 한맥 지도교수였던 고 김윤환 교수와 얽힌 일화도 소개했다. 노동경제학의 대가인 김 교수는 고려대에서 세 차례나 해직을 당했다. “오 교수는 유신 때 유정회 1기 국회의원을 하신 분이죠. 제가 주례 부탁을 했을 때도 ‘자네의 길과 내 길이 다르지 않나. 한맥 지도교수인 고 김윤환 교수에게 부탁해보라’고 하셨죠. 두 분이 극과 극의 가치관을 가졌지만 사적으로는 매우 가까웠어요. 김 교수가 1971년 해직당했을 때는 제가 오 교수가 사 준 쌀 두 가마니를 삼륜차에 싣고 김 교수 집까지 가져다주기도 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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