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소설 <2화>
수업은 늘 5분에서 10분 정도 늦게 끝났다. 나는 가방을 챙겨 서둘러 나오는 편이었지만 그날은 두고 온 우산을 되가져오느라 조금 늦어졌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보니 거기 와와가 서 있었다. 나는 간단히 눈인사를 한 뒤 문 쪽을 바라보며 섰다. 문이 열렸고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내렸고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와와는 보이지 않았다. 딱히 할 말도, 용건도 없으면서 나는 크고 넓은 1층 로비를 두리번거리다가 건물을 나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막 우산을 펼치려는데 저 멀리 와와가 보였다. 우산도 없이 한쪽 어깨에 커다란 가방을 메고 빗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왜 와와를 불렀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그쪽으로 지나가야 하니까. 혹시라도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나를 본다면 내 입장이 좀 난처해질 것 같았다. 빗줄기가 거세지고 있어서 걱정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와와.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이 내 목소리를 잘라먹었다. 와와. 나는 재게 걸었다. 사람들이 재미있다는 듯 나를 흘끔거리고 지나갔다. 점심 무렵이라 직장인도, 음식을 배달하는 오토바이도 많았다. 내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와와는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버스 정류장 어딘가에 서 있었던 것 같은데 도착하고 보니 가고 없었다.
어제 널 불렀는데 돌아보지 않더라.
다음 날 와와에게 말했다. 무작위로 두 명씩 짝을 지어 어제 무엇을 했는지 묻고 답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우산을 쓰고 가는 시늉을 하며 같이 쓰고 가려고 했었다고 말했다. 와와는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다행히 버스가 빨리 왔고 정류장과 집이 가까워 비를 많이 맞지 않았다고도 했다. 우리는 이 모든 이야기를 영어로 했는데 아주 기본적인 단어 몇 개면 충분했다. 신기했다. 평소 뭐하러 이렇게 많은 단어를 동원하고 있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그즈음 나는 밤마다 인터넷을 뒤지고 오래된 다큐멘터리를 찾고 그걸 보면서 맥주를 마셨다. 맥주가 다 떨어지면 어두운 골목을 걸어가 맥주를 더 사왔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가까운 편의점을 두고 더 멀리 있는 편의점까지 걸어가야 하는 날도 있었다. 야밤에 편의점을 지키는 알바들은 기억력이 좋았다. 가끔씩 그들이 내 뒤통수에 대고 게으르다거나 한심하다거나 별 볼 일 없다거나 그런 유의 말들을 뇌까린다고 생각하면 술이 다 깨는 기분이었다. 내일은 더 멀리까지 가야지. 돌아오는 길에 늘 그런 다짐을 했지만 지켜지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네르바의 네 식구는 거대한 쓰레기장에서 하루를 보냅니다.
내가 보는 다큐는 주로 태어날 때부터 가난해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하고 결혼을 하고 어쩌다 애를 많이 낳고, 그러는 동안 건강을 잃고 그럼에도 대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단 하루도 쉴 수 없어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다리가 하나 없거나 팔이 하나 없거나 태어날 때부터 코가 없거나 눈이 안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정은 어디나 크게 다르지 않아서 다큐를 보다 보면 피부색이나 국적, 배경 같은 것들만 교묘하게 뒤섞어 합성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 궁핍이나 허기 같은 것들은 모든 사람들을 다 비슷비슷하게 만들어버리는지도 몰랐다. 그것들은 엄청난 기세로 대륙을 가로지르고 산맥을 넘고 바다를 건너고 아무 집에나 불쑥 쳐들어가 죽지 않고 거기서 계속 살았다.
미안하죠. 너무 미안해요. 어떻게 미안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다큐 속에서 사람들은 경쟁이나 하듯 제 부모에게 자식에게 형제에게, 이웃이나 동료에게, 심지어 죽은 사람에게까지 항상 그렇게 사죄했다. 미안한 일이 너무 많아서 미안하다는 말조차 할 수 없다는 그들의 처지는 안쓰러웠지만 때때로 너무 무능해 보여서 화가 났다. 먹고살기 힘들다고 툭하면 흐느끼면서도 서로를 옭아매고 주거니 받거니 서로의 노동력과 기회와 인생 같은 걸 착취하거나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희생한다고 하지만 그게 다 같이 망하자는 게 아니고 뭔가. 나는 따져 묻듯 중얼거리며 사온 맥주를 차례로 비웠다. 맥주를 다 비우면 또 어느 틈엔가 마음이 물렁해져서 화면 속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바보처럼 훌쩍거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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