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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1.14 09:14 수정 : 2015.01.14 09:14

김혜진 소설 <3화>



며칠 뒤 수업을 마치고 나는 와와와 함께 큰길 쪽으로 걸었다. 여름이 지난 건 확실했지만 낮에는 여전히 햇살이 따가웠다. 와와는 한 손을 이마에 올린 채 해를 가렸다. 그때마다 손목에 끼워 넣은 알록달록한 팔찌들이 찰캉찰캉 부딪혔다. 나는 보폭을 맞춰 걸으며 미리 봐둔 식당이 있는데 여기서 멀지 않다고 말했다. 와와는 걷는 데는 자신 있다고 했고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우리가 간 곳은 육수가 진하고 담백한 국숫집이었다. 점심시간이라 식당은 붐비고 있었다. 우리는 입구에 서서 누군가 우리를 발견해주길 기다려야 했다. 쟁반을 든 종업원들이 몇 번이고 우리를 그냥 지나쳐갔다. 나는 커다랗게 벽에 걸린 메뉴판을 가리키며 와와를 돌아다보았다. 와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람들을 피해 벽에 붙어 서 있었다. 뭘 먹겠느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문득 오래전에 너희 나라를 여행한 적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그때 정말 맛있는 국수를 먹은 적이 있어.

밤이었고 좌판들이 늘어선 골목길에 여행객과 현지인이 뒤섞여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낮 동안 뜨거웠던 열기가 한풀 꺾였는데도 간이 의자에 앉아 한 손에 그릇을, 한 손에 젓가락을 들고 국수를 먹는 동안 땀으로 온몸이 다 젖었다. 사흘간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때였다. 장염이었나. 식중독이었나. 아무튼 뭐든 먹으면 곧장 구토가 치밀었기 때문에 미지근한 물만 먹고 4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 여기저기를 쏘다니느라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민소매 차림의 현지 남자들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굿, 굿, 물어봤었어. 굿, 정말 굿이라고 말해줬지. 나는 내 그릇에 국수를 조금씩 덜어주던 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정의 얼굴이나 표정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주홍색 가로등 불빛을 뒤집어쓴 것 같은 정의 어둑어둑한 실루엣만 또렷하게 생각났다.

그때 파치를 처음 먹었어. 파치, 파치 말이야.

파치가 고수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고약한 향이 나는 풀 말이다. 향이 역하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부터 나는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먹게 되었다. 와와는 한참 만에 그 말을 알아듣고 반가워했다.

국물이 시원하고 맑았어. 면도 부드럽고. 가격도 저렴했는데 정말 맛있었어.

사실 그런 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그건 이제껏 누구에게도 한 번도 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정과 나는 5년을 만났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했는데 나는 돈을 거의 모으지 못하고 정이 여행 경비를 거의 다 부담했고 그래서 나는 여행 내내 사소한 것에도 짜증을 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그땐 어려서 늘 어린애같이 굴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별로 달라진 건 없어서 얼마 전 정이 큰 수술을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도 망설이기만 하다가 문자도, 전화도 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금 내가 하고 싶은 건 그런 식으로 요약되고 간추려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집스럽게 국수 이야기만 했다.

와와가 국수를 먹지 못한다는 건 한참 뒤에 알았다. 회사원들이 빠져나가고 빈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을 때 메뉴판을 보던 와와가 놀란 듯 말했다.

난 고기를 먹지 않아. 종교 때문에.

힌두? 라고 물었지만 와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는 뜻인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다른 대안을 생각해둔 게 없었으므로 일단 국숫집을 나와 함께 걸었다. 떨어진 은행 열매들이 터져 악취가 진동했다. 와와는 나처럼 은행 열매를 피해 조심조심 걸었다. 대로변까지 나왔는데도 딱히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즈음 나는 끼니마다 혼자 밥을 먹었고 그마저도 대부분 집에서 대충 해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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