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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1.26 09:50 수정 : 2015.01.26 09:50

조수경 소설 <유리> ⓒ이현경



조수경 소설 <1화>



출국장 주변은 떠나는 사람들로 붐볐다.

여권과 비행기 티켓을 손에 들고 게이트 안으로 사라진 사람들은 몇 시간 후면 하라주쿠 거리를 걷고 있거나 눈 쌓인 오사카 성을 카메라에 담고 있을 것이다. 국제선 청사를 배회하거나 곳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도 오늘 안에는 동방명주탑 전망대에 올라 야경을 바라보거나 워런마터우를 거닐며 석양을 감상하게 될 것이다.

나는 벌써 세 시간 가까이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커피를 주문하고, 커피를 마시고, 다시 뜨거운 커피를 주문해가면서 떠나갈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테이블에 노트북을 펼쳐놓았지만 그것은 그저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면 나는 차를 몰고 김포공항으로 나왔다. 전에는 가끔 인천공항까지 달려가기도 했는데, K구로 이사 온 뒤부터는 집에서 가까운 이곳을 찾았다. 출국장 맞은편에 위치한 카페는 커피 맛이 좋기로 유명했고 그것이 김포공항을 찾는 또 다른 이유였다. 진한 커피를 마시며 곧 이곳을 떠나갈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다 보면 막혀 있던 혈관이 조금은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공항에 있는 사람들은 떠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었다. 나는 떠날 사람이 누구인지 골라낼 수 있었다. 바퀴가 달린 가방이나 유난스러운 옷차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떠날 사람은, 뭐랄까, 떠날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편과의 관계에 위기를 느꼈을 때, 나는 K구에 있는 오피스텔로 거처를 옮겼다. 1년 전이었다. 잠시 떨어져 지내다 보면 헐거워진 사이가 차차 회복될 거라고 생각했다. 기대와는 달리 지난달 친정아버지 생신 모임에서 본 남편은 이미 떠날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임 이후 남편은 할 말이 있다며 연락을 해왔지만 그 ‘할 말’이라는 게 어떤 종류의 것인지 잘 알 것 같아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만남을 미뤄왔다. 급기야 오늘 오피스텔에 방문하겠다는 통보를 받고 아침 일찍부터 공항으로 도망치듯 달려온 것이다. 다시 진동이 울렸다. 남편은 오피스텔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전화가 자꾸 걸려오는 탓에 신경이 예민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원을 아예 꺼버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나는 휴대전화를 벨벳 소재의 소파 위에 던져두었다. 요란하게 떨리던 진동음이 사라지고 전화기는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혹시, 송명선 작가님 아닌가요?”

갑작스럽게 끼어든 목소리에 놀라 휴대전화를 손에 쥐었다. 마지막 진동이 울리고 곧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테이블 옆에 서 있는 여자를 올려다봤다. 은회색 앙고라 니트에 크림색 모직 바지를 입은 여자는 한눈에 봐도 세련돼 보였다. 짙은 화장이나 화려한 장신구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고, 감색 코트를 단정하게 접어 팔에 걸친 모양새나 곧게 편 등과 기다란 손가락 끝에서까지 기품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내 시선은 테이크아웃 잔을 감싸고 있는 하얀 손가락을 지나 왼손 약지에 낀 티파니 세팅의 다이아몬드 반지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여자의 얼굴로 돌아왔다.

“송명선 작가님, 맞죠?”

이제 여자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여자는 벌써부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두 권의 소설집을 내기는 했지만 독자가 알은체를 하며 접근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내게 묻지도 않고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명선아, 나 기억 안 나?”

문제를 풀어보라는 듯 여자는 두 팔을 테이블 위에 얹고 나를 응시했다. 눈의 결정체처럼, 가까이에서 바라보자 여자의 아름다움이 더욱 섬세하게 드러났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려 나는 눈을 슬쩍 피했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여자는 마침내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조수경(소설가)





조수경

1980년에 태어났다.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젤리피시>가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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