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경 소설 <2화>
“나야, 서유리.”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오랫동안 혈관 안을 떠돌던 바늘이 비로소 심장에 박힌 기분이었다. 나는 여자의 얼굴을 낱낱이 살펴보았다. 커다란 눈. 물이 고인 듯 맑게 빛나는 눈동자. 폭이 좁아 더욱 오뚝해 보이는 콧날. 선과 색이 또렷한 입술까지. 이제 여인의 것으로 여물어 있었지만 나는 그 안에서 유리, 너를 발견했다.
유리.
너를 떠올리면 고급 주택의 웅장한 대문부터 그려졌다.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색 대문 양옆으로 대문보다 키가 큰 기둥이 서 있었다. 기둥 끝에는 벌거벗은 아기 천사가 유리 공을 끌어안은 채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갯짓하고 있었는데, 어스름해질 무렵이면 유리 공에 감귤 빛깔의 불이 들어왔다. 커다란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담장 밖으로 여름에는 장미 향이 떠다녔고 가을에는 붉게 물든 단풍이 떨어졌다. 내 기억 속에 너는 언제나 그 돌담집 대문 앞에 서 있었다. 퍼프소매의 화사한 원피스에 가죽으로 만든 메리제인 구두를 신은 모습으로.
6학년 때, 나는 너와 같은 반이 되었다.
새 학년이 시작되던 첫 날. 아이들은 본성을 감추고 자리에 앉아 무심한 척 주변을 살폈다. 이제 6학년이나 되었으니 곳곳에 아는 얼굴들이 제법 눈에 띄었음에도 아이들은 그저 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만 건넸을 뿐 제 자리를 지키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아이들의 들뜨고 불안정한 시선은 사실 창가 끝자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곳에 네가 있었다.
하얗고 매끄러운 얼굴에 고요하게 박혀 있는 눈동자. 커다란 눈이 천천히 열렸다 닫힐 때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법의 힘이 흘러나왔지만, 동시에 다가가고 싶어도 쉽게 접근할 수 없게 만드는 묘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소녀. 너는 그런 아이였다.
기이한 정적은 담임교사가 나타난 뒤에야 깨졌다. 교실 앞문을 밀고 들어온 담임은 얌전하게 앉아 있는 아이들을 보고 오히려 당황한 모습이었다. 늘 두통을 달고 사는 듯 굳은 얼굴을 한 중년 여성은 칠판에 본인의 이름 석 자를 적은 뒤 교탁에 놓인 출석부를 집어 들었다.
“아.”
담임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출석부에서 눈을 떼고 아이들을 바라봤다.
“서유리.”
담임의 말에 너는 천천히 손을 올리며 네, 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와 눈이 마주친 순간 담임의 좁은 미간이 활짝 열렸다.
“유리는 며칠 전에 전학 와서 아는 친구가 없으니까 다들 친하게 지내도록.”
내내 너를 훔쳐보던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유리. 나는 속으로 너의 이름을 발음해보았다. 그러니까 너는, 현주나 지혜, 은영 같은 흔한 이름도 아니었고 명선이나 미화, 지숙 같은 촌스러운 이름도 아니었다. 유리. 그 영롱한 빛깔의 단어는 너를 통해서 현현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 덕분에 너와 나는 짝이 되었다. 담임이 출석부를 들고 한 사람씩 호명할 때, 서유리 다음에 불린 사람은 나, 송명선이었다. 출석 번호가 앞뒤로 붙어 있다는 사실이 기뻤고 번호 순으로 짝을 정하겠다는 담임의 말에 가슴이 뛰었다. 반 아이들은 너와 짝이 된 나를 부러워했다.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간 다른 반 아이들이 우리 반 복도 앞을 서성거렸다. 모두 ‘서유리’를 보기 위해 몰려든 것이었다. 다른 반 교사들은 물론 학교 앞 문구점 아저씨나 솜사탕 장수까지 너를 예뻐했다. 그렇게 너는 특별한 아이였다. 키나 몸집은 또래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풍기는 분위기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은 확연히 달랐다.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아이답게 너에 관한 소문 역시 끊이지 않았다. 교문 앞에 멈춰 선 고급 승용차에서 네가 내리는 걸 목격한 아이들이 여럿 있었는데, 때문에 네가 유명 여배우의 딸이고 곧 너 역시 아역 배우로 데뷔할 거라는 말이 돌았다. 네가 H제과의 손녀라는 말도 있었는데, 당시 학교 근처에 H제과 회장이 살고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였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비밀스러운 말들이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부터가 가짜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너를 둘러싼 소문들이 너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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