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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1.28 09:44 수정 : 2015.01.28 09:44

조수경 소설 <3화>


“넌 어디 살아?”

그날은 가정환경 조사서를 제출하는 날이었다. 책상 위에 가정환경 조사서 용지를 반듯이 올려놓으며 너는 내게 물었다.

그 시절, 학교 근처의 동네는 세 구역으로 나뉘었다. 정문 앞으로 난 도로를 중심으로 위쪽은 부자들이 사는 곳이었다. 사극에 출연 중인 중견 탤런트나 히트곡이 여럿 있는 가수가 그쪽에 살았다. 4학년 때랑 5학년 때는 나도 몇 번인가 아이들과 어울려 탤런트나 가수의 집 앞을 괜히 서성거렸다. 널찍하고 반듯하게 포장된 길마다 대궐 같은 집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아이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집을 하나씩 점찍으며 나중에 이런 데서 살 거라고 큰소리쳤다. 도로를 건너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3층짜리 다세대주택이나 오래된 단독주택이 들어선 골목이 나왔다. 우리 집은 그 구역에 있는 작은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이었다. 골목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재래시장이 나왔고, 시장 아래로 더 내려가면 낡고 허름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구역에 사는 아이들은 옷차림이 낡기도 했지만 얼굴에서부터 왠지 모르게 가난이 느껴졌다. 존중이나 관심이 결핍된, 그러나 방치와 체념에는 익숙한 눈빛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아이들은 같은 구역에 사는 아이들끼리 어울려 다녔다.

“길 건너편. 여기서 멀지는 않아. 너는?”

“응, 나는 수양대군 집 근처.”

‘수양대군’은 당시 중견 탤런트가 맡고 있는 배역이었다. 나는 너의 책상을 슬쩍 바라보았다. 용지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직업란에 모두 ‘의사’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공상에 빠지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수업 시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펼쳐진 상상은 교과서 한 귀퉁이에 만화로 표현됐다. 너는 내가 그린 만화를 들여다보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았다. 내가 그린 그림을 좋아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나는 더 많은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이면 너는 내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목련이 지고 벚꽃이 만개했을 무렵, 나는 너를 집에 데려갔다. 그즈음 제법 친해진 우리는 함께 숙제를 하기로 했다.

도로를 건너고 보도블록이 깔린 골목에 들어섰다. 너와 나는 보도블록 사이에 피어난 제비꽃을 신주머니로 톡톡 건드리며 걸었다. 바닥에 누군가 분필로 그어놓은 땅따먹기 그림이 나오면 숫자 1부터 8까지 깡충깡충 차례대로 점프하며 지나갔다. 우리는 초록색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몇 군데 페인트가 벗겨지고 중앙에는 사자 두 마리가 문고리를 입에 물고 있는, 동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문이었다.

“여기야.”

그렇게 말하고 나는 팔분음표가 음각된 버튼을 눌렀다.

장독대와 작은 화단이 있는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열면 나무로 된 마루와 벽이 보였다. 거실 한가운데 천으로 된 투박한 모양의 소파가 놓여 있었는데, 겨울철에는 정전기가 일어 앉으려다가 도로 벌떡 일어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거실에서 곧장 연결되는 부엌 입구에는 아치형의 흰색 레이스 천이 늘어져 있었고 그 너머로 식탁과 의자 다섯 개가 단정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1층에는 그 밖에도 안방과 할아버지 방, 오빠 방, 그리고 화장실이 있었다. 너는 그 커다란 눈으로 집 안을 찬찬히 둘러봤다.

내 방은 2층이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피아노가 놓인 작은 거실과 창고로 쓰는 방, 그리고 내 방이 나왔다. 내 방 천장은 경사 지붕의 비스듬한 면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너는 그 점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너와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서 숙제를 했다. 그날 엄마는 참치와 감자와 계란을 으깨서 다진 야채와 함께 마요네즈에 버무린 샌드위치를 만들어주었다. 너는 그것을 맛있게 먹었고 집에 돌아가기 전에 남은 샌드위치를 싸가도 되는지 물었다. 나는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부모님이 모두 의사인 데다 언제나 좋은 옷만 입고 다니는 네가 우리 엄마가 만들어준 간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저희 엄마는 바빠서 이런 거 안 만들어주시거든요.”

남은 샌드위치를 쿠킹 포일에 포장하고 있던 엄마에게 네가 말했다. 너의 시선은 부엌 한쪽에 나란히 꽂혀 있는 요리책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독일제 냄비 세트 등 주방용품을 방문 판매하는 아주머니로부터 큰맘 먹고 오븐을 구입한 엄마는 다음에 놀러 오면 컵케이크를 구워주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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