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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1.29 09:48 수정 : 2015.01.29 09:48

조수경 소설 <4화>



*

“난 네가 작가가 될 줄 알았다니까.”

테이크아웃 잔을 컵 홀더에 내려놓으며 너는 웃었다. 너는 같은 말을 벌써 여러 번 반복했다. 옆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서유리’라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아 나는 자꾸만 너를 돌아봤다. 누군가와 우연히 마주치는 일은 이따금씩 일어나지만, 너와 이런 식으로 마주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너의 무릎에 얌전히 놓여 있는 은색 클러치백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평일 오전의 도로는 한산했지만 시내의 복잡한 구간을 지날 때만큼이나 신경이 곤두섰다.

아까 카페에서 마주쳤을 때, 너는 감탄사를 거듭 내뱉었다. 자기는 이제 막 상해에서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가 뜬금없이, 네 소설 중에 특히 어떤 작품이 좋더라, 라고 했다가, 세상에 너무 반갑다, 하며 다시 감탄하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느냐고 묻기에 나는 그냥 바람 쐬러 나왔다고, 곧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대답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혹시라도 네가 같이 밥이나 먹자는 말을 꺼낼까 봐 미리 계산하고 한 말이었다. 집에 갈 거라는 말을 듣고 너는 반색했다.

“너 아직 S구에 사니? 별일 없으면 나 좀 태워다 줄래? 우리 집도 그쪽이거든.”

너는 Q서점에서 매달 발행하는 웹진 ‘소설가의 방’ 코너에 실린 기사를 읽었다고 했다. 그때 웹진에 소개된 방은 남편과 함께 살던 S구의 아파트였다. 남편과 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으므로 따로 작업실을 얻지 않고 방 하나를 서재 겸 집필실로 꾸며서 사용했다. 몇 년 전에 그 방에서 인터뷰를 했고 책장을 배경으로 사진도 몇 장 찍었다. 그때는 남편과의 사이가 틀어지기 전이었다. 지금은 K구에서 혼자 지내고 있지만, 너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가자고 했던 것이다.

“신문에 실린 네 사진을 봤을 때 말이야, 꼭 내가 당선된 것처럼 가슴이 떨리더라니까.”

너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입술 가까이 맞댄 두 손은 미사포를 쓰고 기도하는 여인을 연상시켰다. 너는 오래전부터 동창 찾기 웹 사이트에서 나의 흔적을 찾았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언젠가부터 매년 신춘문예 당선자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는데, 그건 내가 소설가가 될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너의 믿음처럼 몇 년 뒤 당선자 명단에서 내 이름과 사진을 발견했고, 또 그로부터 몇 년 뒤에 출판된 내 첫 번째 소설집을 서울에서 가장 큰 서점에 가서 직접 구입했다고 말했다. 내 책은 물론, 나와 관련된 기사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찾아봤기에 20년도 더 지난 지금 나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며 너는 웃었다.

“참, 명선아, 그거 기억하니? 너랑 나랑 주고받았던 돌림노트 말이야.”

너의 말을 듣는 순간, 망각의 책장에서 빛바랜 노트 한 권이 툭 떨어졌다. 무지개 그림 아래로 너와 나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는 노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노트, 나 아직 가지고 있어. 놀랍지?”

너는 핸들을 잡고 있는 내 손 위에 하얗고 긴 손가락을 가볍게 얹었다. 너의 말대로 나는 놀랐다. 20년도 더 된 노트를 아직 간직하고 있다니. 그렇다고 해서 오래된 보물을 찾은 것처럼 기쁘거나 반가운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노트에 적혀 있을 내용을 떠올리자 오히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데 명선아.”

너는 내 손을 힘주어 잡았다. 잘 다듬어진 긴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네 소설 말이야. 내 얘기는 쓰지 않았더라. 난, 어쩌면 네가 내 얘기를 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너는 고개를 돌려 내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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