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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경 소설 <유리>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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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경 소설 <6화>
문의 크기만큼 안쪽 세상이 드러났다.
거기엔 내가 상상했던 푸른 잔디밭이라든가, 연잎이 떠 있는 작은 연못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본 것은 지하로 이어지는 시멘트 계단과 계단 아래에 있는 작은 문이 전부였다. 안쪽은 온통 그늘이 져 있어 여름인데도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들어와.”
네가 입을 열 때까지 나는 굳은 듯 쪽문 앞에 서 있었다. 당황인지 실망인지 모를 감정을 들켜버린 것만 같아서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발을 뗐다. 안에 들어가자 왼편에 앞마당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보였다. 구부러진 길 끝으로 햇살이 새어 들고 있었다. 길을 따라가면 잔디밭도, 연못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너는 그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에는 네 개의 작은 문이 있었다. 너는 그중 두 번째 문에 다시 열쇠를 꽂아 넣었다. 쪽문을 열었을 때 바로 보이던 그 문이었다. 집 안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너는 익숙하게 손을 뻗어 불을 켰다. 안쪽은 방, 현관 쪽은 부엌. 기다랗고 단순한 구조의 집이었다. 욕실과 화장실은 복도 끝에 따로 있었는데, 이웃집과 공동으로 쓴다고 했다.
“실망했니?”
그때 너의 눈은 쓸쓸하게 빛났다. 나는 대답 대신 너를 꼭 끌어안았다.
여름방학 내내 나는 너의 집에 드나들었다. 너의 집에는 언제나 너 혼자였으므로 그곳은 우리의 아지트나 다름없었다. 너의 집에는 어떤 이유에선지 전화기가 없었다. 매일 정오에 나는 엄마가 만들어준 간식을 품에 안고 쪽문을 두드렸다. 그러면 너는 단숨에 계단을 올라와 문을 열어주었다.
지하의 어둡고 습한 방에서 우리는 나란히 엎드려 방학 숙제를 했다. 이제 막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서로의 젖가슴을 만지며 키득거렸다. 너는 보물을 담아둔 주머니에서 빨간 립스틱을 꺼내 내 입술에 발라주었다. 또, 내게 어른 글씨를 흉내 내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네가 돌림노트를 읽을 때면 나는 바닥에 누워 방 안을 둘러봤다. 가구라고 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고 옷걸이와 거울, 그리고 짐 가방이 전부였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짐이 들어갈 만큼 커다란 가방이었는데, 그 때문에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방처럼 보였다. 옷걸이에는 네가 입는 옷 말고도 어른 옷이 몇 벌 걸려 있었다. 그 낡은 옷들 중에 ‘의사’가 입을 만한 옷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너는 부모님에 대해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고 나 또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주인집 아줌마는 나를 정말 예뻐해. 볼 때마다 내가 진짜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래.”
대신 너는 주인집 식구들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를 했다.
“어제저녁엔 마당에 있는 테이블에서 다 같이 수박을 먹었어. 오빠가 무서운 얘기를 해서 하마터면 울 뻔했지 뭐야. 내가 너무 무서워하니까 아줌마가 괜찮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줬어. 그러니까 정말 괜찮아지더라. 아플 때 아저씨랑 아줌마가 쓰다듬어주면 금방 나을지도 몰라. 두 분 다 진짜 의사거든.”
나는 잘 깎인 잔디밭 한쪽에 놓인 하얀색 철제 테이블과 의자를 상상했다. 시원한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주인집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향해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너의 모습도.
“명선아, 너는 이사를 한 번도 안 해봤다고 그랬지? 나는 이사를 자주 다녔어. 어떨 땐 1년에 세 번, 네 번도 다녔어. 바로 요전 집 주인아저씨는 대학교 교수님이셨거든. 집에 책도 엄청 많고 엄청 똑똑하셨어. 그 집에 중학생 언니가 하나 있었는데, 날 친동생처럼 예뻐했어. 작아서 못 입는 옷이랑 신발이랑 다 물려주고. 여기로 이사 올 때 다 들고 올 수는 없었지만…….”
너는 구겨진 치맛단을 내려다보다가 손바닥으로 가만가만 문질렀다. 구김이 쉽게 펴질 것 같지 않았지만 너는 손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그 위로 내가 알지 못하는 작고 어두운 방에 엎드려 가정환경 조사서를 작성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겹쳐졌다. 어른 글씨를 흉내 내며 부모님 직업란에 ‘교수’라고 적어 넣는 아이의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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