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5.02.04 09:27 수정 : 2015.02.04 09:27

조수경 소설 <8화>


*


방학은 짧았고, 개학을 한 뒤에는 시간이 더 빠르게 흘러갔다.

빨갛고 노랗게 단풍이 들었을 무렵, 담임교사는 미술 시간에 조별 과제물을 내주었다. ‘나, 너, 우리’라는 주제로 조원끼리 자유롭게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몇 달 뒤 졸업을 하고 뿔뿔이 흩어질 아이들에게 친구들과 추억을 쌓으라는 배려이기도 했다. 담임은 우정과 협동심이 잘 드러난 작품에 높은 점수를 줄 거라고 강조했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세 명씩, 총 여섯 명이 한 조였다. 6학년에 올라온 뒤로 나는 줄곧 너와 단짝으로 지냈기에 다른 아이들과는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아니, 친해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도시락도 너와 단둘이 먹었고, 주번도 너와 함께 맡았고, 과학실로 이동할 때나 체육 수업을 할 때도 너와 손을 잡고 다녔다. 번호대로 조를 짰기에 다행히 나는 너와 같은 조였고, 너 역시 그 점에 안도하며 내게 미소를 보냈다.

방과 후에 조별 첫 모임을 가졌다. 먼저 조장을 선출했다. 우리는 제비를 뽑기로 했는데, ‘당첨’이라는 글자가 적힌 종이를 고른 사람은 나였다.

운동장 한구석에 있던 원두막에서 오랜 회의 끝에 우리 조는 ‘타임머신’을 콘셉트로 작품을 만들기로 했다. 유에프오를 본뜬 타임머신에 여섯 명의 조원이 탑승하고 미래의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 그렇게 우리의 우정은 미래까지 쭉 이어질 것이라는 의미를 담기로 했다. 아이디어가 완성되자 조원들은 흥분했고 다른 조 아이들에게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하자며 목소리를 낮췄다.

조원들은 다시 두 명씩 짝을 이뤘다. 사진반에서 활동하는 기환이가 조원의 사진을 찍으면 글씨를 정갈하게 잘 쓰는 희연이가 노트에 우리들의 사진을 붙이고 그 옆에 각자의 취미와 특기, 장래 희망, 미래의 친구에게 전하는 메시지 같은 것을 적어 넣기로 했다. 다른 두 명은 타임머신을, 너와 나는 타임머신이 출발하는 장소인 학교 운동장을 만들기로 했다.

다음 모임에 우리는 먼저 사진을 촬영했다. 타임머신에 얼굴만 오려서 붙여둘 사진은 다들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찍었다. 노트에 붙일 사진은 각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서 찍기로 했다. 너는 집 앞에서 찍겠다고 말했다.

너의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너의 손을 잡아당기며 눈짓했다. 괜찮겠냐는 뜻이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는 그저 커다란 눈을 천천히 열었다 닫으며 미소를 지었다. 대체 어쩔 생각이지. 그 쪽문 앞에서, 혹은 지하에 있는 작은 문 앞에서 사진을 찍겠다는 건가. 나는 너의 생각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낡고 허름한 집은 가장 친한 친구인 나에게만 공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너의 손을 놓아버렸다.

궁전 같은 집들을 지나 네가 걸음을 멈췄을 때, 아이들은 일제히 우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너는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색 대문 앞에 섰다.

“난 여기서 찍을게.”

퍼프소매의 벨벳 원피스에 가죽으로 만든 메리제인 구두를 신은 너는 웅장한 대문 앞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나는 입 밖으로 짧은 숨을 토해냈다. 마음의 가장 깊숙한 층이 통째로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은 너에게 장난스러운 포즈를 요구하며 소란스럽게 굴었고, 너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화사하게 웃으며 카메라를 바라봤다.

찰칵.

셔터를 누르는 순간, 조리개의 움직임을 따라서 하나의 세계가 닫히고 다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기분이었다. 그때 나는 그 장면이 내 기억 속에 그토록 오래 박혀 있게 될 것을 알지 못했다.

“얘들아, 나 책가방 놓고 올게. 잠깐만 기다려줘.”

촬영을 끝내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네가 말했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돼 빈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서 차가운 땀이 새어 나왔다. 너는 돌담을 반 바퀴 돌아가는 대신 대문으로 이어지는 두 개의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벨을 눌렀다.

“저예요, 유리.”

철컹. 문이 열렸다. 아이들은 열린 문틈으로 집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목을 쭉 빼고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금방 올게.”

너는 그렇게 말하고 대문을 닫았다. 안쪽에서 점점 멀어지는 너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마당을 가로질러 뒷마당을 지나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서둘러 밟고 있을 너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우아. 서유리네 집 진짜 좋다.”

아이들은 닫힌 대문 앞에 서서 침을 튀겨가며 감탄을 했다. 나는 돌담 아래 떨어진 붉은 단풍을 발로 짓이겼다. 대문을 열고 네가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너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한겨레출판 문학웹진한판 바로가기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조수경의 <유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