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경 소설 <9화>
다음 날, 너와 나는 문구점에 들렀다가 우리 집으로 갔다. 내가 조금 앞서서 걸었고, 네가 그 뒤를 따라왔다. 우리는 스티로폼에 풀을 바르고 모래를 뿌려 운동장을 완성했고 작은 상자에 색종이를 붙여서 학교 건물을 세웠다. 수수깡으로 그네며 미끄럼틀을 만들고 성냥개비로 정글짐을 쌓았다. 나는 별말 없이 작품을 만드는 데만 열중했다. 가끔 불안한 시선이 내게 와 닿는 것을 느끼면서.
그날 엄마는 식빵 위에 피자 토핑을 얹고 오븐에 구운 간식을 내왔다. 간식은 늘 넉넉했기에 그날도 접시 위에 몇 조각의 빵이 남아 있었다. 남은 간식은 언제나 쿠킹 포일에 잘 포장해서 네가 가져갔다. 나는 물감으로 정글짐에 색을 입히면서, 이쑤시개 끝에 달아둔 태극기를 학교 앞에 꽂으면서 빵 조각을 하나씩 입에 넣었다. 이미 배가 불렀지만, 나는 그날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조장, 필름에 빛이 들어갔어.”
작품 제출을 앞둔 주말에 기환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 애가 하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풀이 죽은 목소리에서 그것이 나쁜 소식임을 직감했다. 요는, 그 애의 동생이 카메라를 몰래 가지고 노는 바람에 필름이 못 쓰게 됐고 결국 조원들의 사진을 다시 찍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진을 바로 현상해두지 않은 기환이를 타박하려다 말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곧 조원들에게 연락해 상황을 전달했고, 우리는 2시에 학교 앞에서 모이기로 약속했다. 다만 너와는 통화를 할 수 없었다. 너의 집에는 전화기가 없었고, 네가 비상용으로 알려준 주인집 번호로 걸어봤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어찌 된 마음인지 나는 너와 통화가 되지 않은 상황을 다른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2시가 되기 전에 연락을 받은 아이들이 모두 모였다.
“유리가 늦네?”
누군가 말했지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길가를 바라봤다. 마치 너를 기다리는 것처럼.
2시 10분쯤 됐을 때 기환이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그쪽으로 가자. 어차피 유리는 집 앞에서 촬영할 거니까.”
“그래. 가다 보면 마주칠 수도 있겠다.”
누군가 맞장구를 쳤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윗동네로 걸음을 옮겼다. 너와 마주칠 일은 없었지만 골목 어디에선가 네가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너의 집, 아니, 주인집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벨을 누르기 위해 계단에 발을 디뎠다. 아이들은 이 대궐 같은 집 안에 들어갈 생각에 좀처럼 가만히 서 있지 못하고 우르르 계단 위로 올라갔다. 나는 벨을 누르려는 아이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따라와.”
아이들이 놀란 눈을 하고 바라봤지만, 나는 아무런 말없이 그저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돌담을 따라 반 바퀴를 걷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나는 초인종을 누르고, 유리 친구인데요, 말한 뒤에 혼자 그 집 안으로 들어가 지하 방에서 너를 데리고 나올 수도 있었다. 아니, 약속 시간 전에 너의 집에 찾아가 상황을 전하거나, 혹은 그 전에 주인집에서 누군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좀 더 오래 수화기를 들고 기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직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처럼 돌담을 따라 걸어갔다. 그리고 쪽문을 두드렸다.
“유리야, 서유리.”
저 아래에서 지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하나, 둘, 셋…… 계단을 밟고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내 심장은 더 세게 뛰었다. 쪽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 너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너는 내 목소리를 듣고 한달음에 계단을 올라온 것이었다. 나를 보며 환하게 웃던 너의 얼굴은, 그러나 곧 굳어져버렸다. 내 뒤에 서 있던 아이들의 표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쪽문 아래로 어둡고 축축한 지하 세계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작품을 제출하고 담임의 바람처럼 조원들은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함께 어울려 밥을 먹고, 과학실로 이동하고, 우르르 운동장으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우리가 친해진 계기는 담임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란 너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을 뜻했으니까.
아이들과 너의 집에 찾아갔던 날, 그 후의 일은 이상하게도 흐릿하게 남아 있다. 그날 네가 다시 사진을 찍었는지, 우리가 작품을 어떻게 완성했는지, 그런 것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이후의 너 역시 얼굴만 도려낸 사진처럼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다만, 또렷하게 기억하는 몇몇 장면들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더 이상 너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를 따라 쪽문 앞까지 걸어갔던 네 명의 아이들이 또 다른 아이들에게 너에 관해 비밀스럽게 이야기했고, 얼마 가지 않아 반 아이들 모두가 청동색 쪽문이나 어두운 지하 방에 대해 수군거렸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복도 쪽 맨 끝자리에 혼자 앉아 있는 여자애를 향해 웃음을 흘리던 모습. 그것만은 네거티브필름의 한 조각처럼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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