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경 소설 <10화>
겨울방학이 지나고, 다시 개학을 하고, 얼마 후에 졸업을 했다. 졸업식 날 앨범을 받았는데, 단체 사진마다 나는 너와 어깨를 붙이고 서서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 찍은 사진이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가족들과 함께 동네에서 제일 큰 중국집에 갔다. 곳곳에 아는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탕수육이나 깐풍기를 입에 넣으면서 나는 테이블 주변을 자꾸만 두리번거렸다. 다음 날, 나는 배탈이 났다. 다른 가족들은 다 괜찮은데 왜 나만 이러는지 모르겠다면서 엄마는 속상한 얼굴로 약을 챙겨주었다. 며칠 배앓이를 하고 몸이 다 나았을 때, 나는 졸업 앨범을 옷장 위에 깊숙이 밀어두었다. 그리고 다시 꺼내보지 않았다.
시간이 좀 더 흘러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얼마 후에 우리 집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 동네를 떠나온 뒤에도 나는 이따금씩 너를 생각했다. 네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여전히 눈부시도록 아름다울지 궁금했다. 하지만 너를 떠올리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는데, 그건 유리, 너 때문은 아니었다.
“여기야.”
S구의 주택가에 들어서고 얼마 되지 않아 너는 손가락을 뻗어 한 집을 가리켰다. 시시티브이가 여럿 달린 저택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부촌의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었음 직한 고풍스러운 집이었다. 높고 단단하게 쌓아 올린 담장 너머로 나이 많은 나무들이 가지를 곧게 뻗고 있었다. 담장의 둘레가 얼마나 될지 직접 돌아보지 않고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태워다 줘서 고마워.”
너는 표정 없는 얼굴로 내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봤다. 그리고 차 문을 열었다.
“유리야.”
오래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나는 너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바싹 마른 입술만 깨물었다.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을 내 안에 영원히 가둬두려는 것처럼 너는 내 말을 가로챘다.
“돌림노트 말이야.”
너는 잠시 침묵했다.
“잘 간직할게. 그건 너와 나만의 비밀이니까.”
그렇게 말하고 너는 내 손을 힘주어 잡았다가 놓았다. 손등 위에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네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또 보자, 혹은, 언제 차라도 한잔 마시자, 같은 것이 아니었다. 너는, 앞으로도 네 소설 잘 지켜볼게, 라고 말했다.
저택 앞에 서서 너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서 대문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올라섰다. 나는 오래전에 느꼈던 긴장을 다시 한번 느꼈다. 너는 벨을 눌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저예요, 유리.”
네가 대문 안으로 사라지고 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그대로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다. 언젠가 분명 너의 이야기를 쓰게 될 거라고. 하지만 이제 나는 그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다. 고개를 돌려 네가 들어간 대문을 바라봤다. 네가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자 어쩐지 용서받은 기분이었다.
차를 출발시켰다. 저택 담장을 따라 내려가면 큰길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다음에 어디로 갈 것인지 나는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멀지 않은 곳에 남편과 함께 살던 아파트가 있지만 그곳에 갈 수는 없었다. 남편이 기다리고 있을 K구의 오피스텔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채 담장을 따라 무심코 달렸다. 어디를 가든 주택가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순간, 무의식이 쳐놓은 망에 어떤 풍경 하나가 걸려들었다. 나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담장 한쪽에 파란색 쪽문이 나 있었다.
차창을 내리자 찬 공기가 매섭게 들이닥쳤다. 나는 쪽문을 응시했다. 열쇠 구멍에 부딪힌 겨울 햇살이 예리하게 쪼개지며 빛났다. 눈이 시렸다. 문득, 너의 무릎 위에서 반짝이던 은색 클러치백이 떠올랐다. 중국에서 이제 막 입국했다는 네가 손에 들고 있던 거라곤 작은 클러치백이 전부였다. 동시에 너와 마주친 곳이 3층 출국장 맞은편의 카페였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입국장은 1층이었다. 나는 컵 홀더를 내려다봤다. 네가 두고 간 커피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다시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입에서 새어 나온 뜨거운 김이 바람을 타고 멀리 흩어졌다. 잘 포장된 도로에 서서 나는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주택가는 적막했다. 깨질 듯이 투명한 겨울 하늘 위로 검은 새들이 줄지어 날아갔다. 나는 쪽문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어쩌면 이곳에는.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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