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5.02.09 09:34 수정 : 2015.02.09 10:02

황현진 소설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 ⓒ이현경



황현진 소설 <1화>



고향

할아버지는 오래 앓다가 일찍 죽었다. 그게 아버지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할아버지가 죽은 지 20년을 훌쩍 넘긴 뒤였다. 할머니는 한때 일본에서 살았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1960년대에 일본에서 무얼 하며 살았고, 왜 돌아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게 아버지에게 어떤 상상을 불러일으켰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베트남 종전 협약이 맺어지던 해, 할아버지는 들것에 실려 집으로 귀환했다. 군복을 입고 있지는 않았다. 얼마 후 아버지의 동생이 줄줄이 태어났다. 그게 당시 일곱 살이던 아버지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는지 나는, 알고 싶지 않다. 할아버지는 귀향 이후 단 한 번도 반듯하게 서 있지 못하다가 죽었다. 그는 깨어 있을 때도 누워 있었고 잠을 잘 때도 누워 있었다. 죽을 때도 누워 있었고 죽고 나서도 누운 자세를 유지했다.

이제 꽤나 늙은 영혼이 되어버린 할아버지는 여전히 똑바로 누운 자세로 공기 중을 흘러 다니고 있다. 서서 돌아다니는 낯선 영혼들의 등짝이나 가슴팍에 정수리를 쿡쿡 처박고 있다. 그게 아버지에게 삶에 대한 어떤 예감을 전했을지 나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할아버지가 죽고 할머니는 성당을 다녔다. 그곳에서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일본말도 한국말도 아닌 이름이 적힌 성도 수첩을 지갑처럼 지니고 살았다. 그게 아버지가 할머니를 때린 이유인지 나는 장담할 수 없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주먹질을 참고 견뎠다. 내심 그것을 정당하다고 여겼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할머니에게 단단한 맷집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죽여버릴 수도 있었어.

아버지가 마당에 부엌칼을 내던지며 울면서 외치던 다음 날, 할머니는 바보 아가씨를 수소문하러 집을 나섰다. 꼭두새벽이었다. 마당 구석에 아버지가 너부러져 자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발끝을 세워 걸었다. 칼날이 반쯤 흙에 묻혀 있던 부엌칼을 주워 들었다. 소똥을 쌓아둔 두엄에 휙 내던졌다. 치맛자락을 겨드랑이에 끼고 부랴부랴 마당을 나섰다. 아버지는 잠결에 칼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냥 바람이 부는가 보다고 여겼고 흙바닥 위를 두어 번 뒹굴었다. 그것은 이불을 둘둘 감는 시늉에 불과했으나 정말 따듯해졌다.




황현진(소설가)





황현진

2011년 장편소설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로 제16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했다. 경장편소설 《달의 의지》가 있다.




한겨레출판 문학웹진한판 바로가기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황현진의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