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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2.10 10:57 수정 : 2015.02.10 10:57

황현진 소설 <2화>



할머니는 곧장 읍내로 달려갔다. 단박에 할머니의 눈에 엄마가 들어왔다. 엄마는 한밤중에 강제로 아버지의 방에 내던져졌다. 다음 날 아침, 할머니는 사라졌고 여덟 달 후에 내가 태어났다. 그게 왜, 아버지를, 화나게 만들었는지 나는 알 것도 같다. 나는 미숙아였으나 덩치가 컸고 머리카락이 길었다. 아버지는 외쳤다. 니들이 나를 망쳤다. 그때마다 죽은 할아버지가 내 가슴팍에 머리통을 갖다 박았다. 겨우 걸음마를 떼어 좁은 방 안을 어기적거리며 돌아다니는 나를 언제나 자빠뜨렸다. 너는 내게 매우 낯선 영혼이야! 죽은 할아버지가 외치는 목소리를 수시로 들어야만 했다.

할아버지는 가벼웠고 살랑대는 바람처럼 낮게 떠돌았지만, 어쨌거나 그는 죽음이어서 내겐 버거웠다. 무른 무릎이 푹푹 꺾였다. 그 바람에 나는 발달이 더디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사람들은 그 모든 지체를 엄마의 탓으로 돌렸다. 아버지는 우리 주위를 맴도는 그 희끄무레한 것이 내 그림자인 줄 알았다. 어둡다. 햇볕 가리지 마라. 허옇게 어두운 그것이 제 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우악스럽게 손사래를 쳐댔다.

잘못했습니다.

어린 내가 방바닥에 무거운 머리를 떨구며 악 받친 울음을 터뜨릴 때마다 엄마는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어김없이 아버지는 엄마의 머리통을 휘갈겼다. 엄마는 모로 쓰러졌지만 벌떡 일어서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

다신 안 그럴게요.

자라서는 나도 엄마와 함께 애원했다. 나는 말을 늦게 배워서 할 줄 아는 말이 몇 개 되지 않았다.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그 말들을 가장 먼저 배운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너무 늦게 빌 줄 알게 된 것은 몹시 불행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자주 빌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뒤늦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아예 때를 놓쳤다는 게 훨씬 맞는 말이었다. 이미 망친 것은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었다.

내가 열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엄마와 나를 데리고 고향을 떠났다. 사는 곳을 바꾸면 삶이 아주 달라질 거라고 기대했지만, 우리가 어느 낯선 도시의 단칸방에 당도했을 때 그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살던 대로 사는 수밖에 없었다. 이사를 하고 나서 아버지에겐 새로운 술버릇이 생겼는데 엄마와 나에게 왜 나만 따라다니느냐고, 이제 그만 나가떨어지라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뒤꽁무니에 엉겨 붙은 것은 엄마와 내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말마따나 제기랄, 어딜 가도 고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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