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진 소설 <4화>
짙은 잿빛의 승용차였다. 보자마자 버려진 것을 비싸게 사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교복부터 먼저 사줄 것이지,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뒷좌석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아버지가 눈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차 지붕 위에 검은 먼지가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손끝을 갖다 대니 검은 먼지가 묻어났다. 쭈뼛거리며 차에 올라탔다. 때마침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뒷문이 쾅 소리를 내며 저절로 닫혔다. 소스라치게 놀란 아버지가 담배를 떨어트렸다.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차창 너머를 살펴보았다. 아버지는 욕을 뱉으며 새 담배를 물었다. 하얀 연기가 아버지의 입 근처를 맴돌다가 사라졌다. 죽은 할아버지가 자동차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열린 문을 찾아 바람에 떠밀려가지 않으려고 낮게 떠다니고 있었다. 저러다 진짜 어디 처박혀 또 죽고야 말지. 나는 몸을 웅크렸다. 차 안의 온도가 영하를 밑도는 듯 했다. 휘휘 둘러보니 운전석 앞창이 뿌옜다. 밤새 내린 서리가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담배를 연달아 세 개비나 피우고 나서야 두 손을 비비며 운전석에 앉았다.
담배 냄새가 물씬 풍겼다. 시동을 걸고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이미 단단하게 굳은 서리는 쉽사리 쓸려가지 않았다. 와이퍼가 덜그럭거리며 차창 위를 오락가락했다. 워셔액을 수차례 뿌렸더니 겨우 차창이 말끔해졌다. 구정물이 창의 가장자리로 길게 흘러내렸다. 할아버지가 저만치 떠내려가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날고 있다기보다 어떤 강력한 자력에 끌려오는 듯했다. 가끔 나는 그 자력의 원천이 아버지인지, 나인지 궁금했지만 확실히 알기는 어려웠다. 할아버지의 머리는 언제나 나를 향해 돌진했지만 그때마다 할아버지의 두 발은 아버지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픈 줄을 몰랐다.
아버지가 거칠게 차를 출발시켰다. 금방이라도 할아버지가 앞 범퍼에 부딪힐 것만 같았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더니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가 뒤를 돌아보며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엄마가 곁에 없어서 무서웠다. 엄마가 없으면 쏟아지는 욕과 주저 없는 매질을 견뎌야 하는 사람은 나뿐이었으니까.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나는 있는 힘껏 사타구니를 오므렸다.
쌍, 재수 없게.
아버지는 뭐든 한 번에 끝내는 일이 없었다. 조용히 하라는 윽박만으로 모자랐는지 기어코 욕을 했다. 나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다가 슬며시 뒤돌아보았다. 우리 집안은 원래부터 대대로 재수가 없지 않았냐고 할아버지에게 묻고 싶어서였다. 할아버지는 멀찌감치 떨어진 허공중에 혼자 남겨져 너울대고 있었다. 문득 긴 전쟁 기간 동안 할아버지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나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오도카니 앉아서 생각했다. 전쟁 통에 살아남는 방법에 대해서. 왜 거기서 죽지 않고 집구석에서 죽었는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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