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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2.24 09:35 수정 : 2015.02.24 09:35

황현진 소설 <9화>



교회 앞에 몇몇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절름발이는 그들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절름발이와 함께 맨 앞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어리둥절했다. 석유 냄새가 실내에 알싸하게 퍼져 있었고 사람들이 군데군데 앉아 있었는데 한결같이 성경책 위에 팔꿈치를 얹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절름발이가 내게 성경책을 펼쳐주고 자기는 주보를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나는 성경을 밀어내고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정면에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한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한쪽 다리를 수직으로 길게 늘어뜨리고 다른 한쪽 다리는 무릎을 약간 들어 올린 채였다. 두 팔을 크게 벌리고 목을 한껏 숙인 그는 깡마르고 발가벗겨져 있었다. 말로만 듣던 예수였다. 나는 그의 하반신이 절름발이와 닮았고, 그의 상반신이 나를 닮았다고 느꼈다. 절름발이가 말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게 벽에 매달려 있는 저 남자와 같아지는 것이었을까?

손톱을 물어뜯으며 괜히 왔다고 후회했다. 절름발이가 친절하고 다정하게 구는 모습도 영 꺼림칙했다. 할아버지를 찾아보았다. 보이지 않았다. 실내가 어두워서 낮게 떠도는 할아버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누군가의 그림자에도 쉽게 가려지는 영혼이어서 놓치기 십상이었다.

후줄근한 갈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강단에 섰다. 목사였다. 아버지 하나님, 이제 다시는 옛사람의 모습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주님 닮은 새 형상으로 거듭나길 기원합니다. 그가 하는 말들은 지루했으나 간간이 아버지라는 단어만은 귓속에 꽂혔다. 목사는 점점 더 큰 목소리로 아버지를 외쳤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는 내게 울지 말라고 가르쳤다. 울어야 할 일은 많았다.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어도 나는 울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는 엄마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묻고 싶었으나 묻지 못했다. 아버지는 내게 매번 속으로 시간을 재라고 가르쳤다. 자기가 나서면 싸움이 되기 쉬우니 네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라고 누누이 일렀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 아니었다. 뒷좌석에서의 시간은 언제나 제멋대로 흘러갔다. 시간이 아예 멈춘 것 같을 때도 있었고 이틀이 지나가버린 것 같을 때도 있었다. 막상 시계를 보면 고작 십여 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하고 싶지 않아요? 라고 묻고 싶은 적도 있었다. 묻지 않았지만 언젠가 물어볼 계획은 세워두었다. 벼르고 벼르는 일 중의 하나였다.

아버지는 내게, 스무 살이 되면 나가서 살아도 된다고 했다. 엄마는 어찌 되느냐고 물으면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화를 냈다. 네 할머니도 아직 살아 있어. 시팔. 니들은 너무 멀쩡해. 그럼 아버지는 어떻게 살아갈 거냐고 선심 쓰듯 물어보기나 하려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

목사는 기도를 끝내고 성경의 어느 부분을 읽던 중이었다. 돌연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는 책에서 눈을 떼고 연단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긴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이니,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먼 곳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란 칼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였다. 할아버지였다.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목사가 같은 문장을 다시 한 번 말했다. 허옇게 어두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연단을 향해 길게 뻗은 통로 위로 바람이 내달렸다. 할아버지의 정수리는 목사의 배를 향해 전속력으로 나아갔다. 울부짖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니들이 나를 망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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