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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부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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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연수의 ‘소년이로다’
누나가 읽던 월간지에서 처음 만난 이상…내 이름과 작품에 새겨진 그의 각인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를 졸라 <소년중앙>이라는 월간지를 정기 구독했다. 만화보다 기사가 더 많은, 지금 생각하면 꽤 수준 높은 어린이잡지였다. 기사에는 퀴리부인의 일생이나 진시황릉 병마용갱의 대발견 같은 기사가 있는가 하면, 세계의 불가사의나 믿거나 말거나 류의 기사도 있었다. 초등학생이니까 아무래도 후자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거기는 밤마다 걸어다니는 밀랍인형이나 대화 중에 자연발화로 불타버린 사람, 혹은 몇 백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는 미녀의 세계였으니까.
소년들이야 그런 잡지를 읽는다고 치고 누나가 읽는 <여학생>에는 어떤 기사가 실리는가 궁금해서 목차를 봤더니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제목이 보였다. 여학생들도 거기서 거기였던 것이다. 해서 나는 밀랍인형과 자연발화와 미라의 세계를 예상하고 페이지를 찾아 펼쳤는데, 웬걸, 거기 달걀 모양의 프레임 속에는 한국 사람의 사진이 있었다. 천재란다. 온갖 괴상한 짓만 하다가 일찍 죽었단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죽고 난 뒤에 박제가 됐단다.
그 기사에는 박제가 된 천재보다 더 무서운 게 있었으니, 바로 <오감도 시제1호>였다. 다들 알겠지만, ‘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라고 시작하는 시인데, 별생각 없이 따라 읽다보니까 어쩐지 걸어다니는 밀랍인형보다 이쪽이 더 무시무시했던 것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그런 식으로 시란, 읽다보면 노래가 되는 거, 읽다보면 감기약 먹은 것처럼 온몸이 나른해지는 거, 그런 거 아니었던가? 하지만 13인의아해라니, 도로를질주하오라는 건 종류가 전혀 달랐다. 어쩐지 막 끌렸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나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게 그가 쓴 단편소설 <날개>의 도입부라는 걸 알게 됐다. <날개>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그 유명한 도입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A빠이.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 위트와 파라독스와……”라는 구절이다. 이 아이러니가 한국 현대문학을 전근대의 수렁에서 구했다면, 너무 과장된 말일까?
그 필명을 사용하는데가장 큰 역할을 한 건
그 이름을 지은 이상이었다
그는 내게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러니가
바로 문학의 일이라는 걸
가르쳐준 사람이니까 학문은 이루기 어렵고, 이상을 좋아하던 소년은 빨리 늙는다기보다는 커서 방위병이 됐다. 나중에 들어보니 군대에서 대형면허 자격증을 딴 사람도 있고, 사법시험 1차를 패스한 사람도 있고, 포경수술을 한 사람도 있던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꽤 많은 분량의 시와 단편소설과, 심지어 장편소설도 썼다. 군대가 무슨 창작촌이더냐고 묻는다면, “그래서 방위지 말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장편소설까지 쓸 생각은 없었는데, 집에 놀러온 고참이 내가 쓴 단편을 읽고는 “이거 진짜 소설 같다!”, 그런데 “너무 짧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길게 쓰지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퇴근이 있지 말입니다. 그렇게 장편소설 과정까지 마스터하고 복학하니 이제 청춘은 다 끝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젊음은 아름다워라, 시도 긁적이고 소설도 쓰고, 아듀, 나의 문학청년 시절이여. 송별 기념으로 나는 그간 썼던 시들 중에서 몇 편을 골라 문학잡지에 투고했다. 그러고는 토플이랄까 토익이랄까, 그것도 아니라면 사시든 시피에이(CPA)든, 뭐, 그런 복학생스러운 것을 공부할 생각으로 수험서 코너를 기웃거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느 날 아침, 김연수를 찾는 전화가 왔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당선 통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김연수라는 그 이름 때문에. 김연수의 ‘연’은 한자로는 ‘衍’이다. 연은 이상이 쓴 <단발>이란 소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의 이름으로 고등학생 때부터 편지 같은 걸 쓸 때면 이 이름을 사용했다. <단발>은 지금 읽어도 흥미진진한 초절정 밀당 기법을 선보이는 상큼한 소설인데, 일찍이 고등학교 시절에 이런 걸작을 읽고 감동받아 주인공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할 정도였으니까 나의 앞날이란 뻔했다. <단발> 속의 연이 도쿄에 갈 거라는 소녀를 교외의 방까지 유인한 뒤, 했던 말은 내 인생의 문장이기도 하다. “그래? 그건 섭섭하군. 그럼 내 오늘 밤에 기념스탬프를 하나 찍기루 허지.” 문예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며 나는 본명 대신에 그 이름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때만 해도 금융실명제를 하기 전이었고, 학교에는 가짜 학생들이 수두룩했으며, 혼인빙자간음죄도 있었다. 요컨대 필명을 사용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었다는 뜻이다. 나는 본래 글을 쓰려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우연찮게 글을 쓰게 됐다는 생각도 필명을 사용하는 데 한몫했다. 그러나 그 필명을 사용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어쨌든 그 이름을 지은 이상이었다. 그는 내게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러니가 바로 문학의 일이라는 걸 가르쳐준 사람이니까. 맛있는 음식을 맛나게 먹는 게 문학이었다면, 나는 애당초 글쓰는 것 말고 다른 쪽을 알아봤을 것이다. 1930년 폐결핵이 걸리기 전, 이상은 경복궁 앞에 있던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했다. 나 역시 1998년부터 경복궁 옆에 있던 출판문화회관으로 출퇴근을 했다. 매일 3호선 경복궁역에서 하차한 뒤, 광화문 안쪽을 거쳐 회사까지 걸어갔다. 그때는 이미 김영삼 대통령이 조선총독부를 철거한 뒤라 완공 당시 동양에서 가장 컸다던 근대식 건축물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실감하진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경복궁 바로 옆 동네인 통의동에서 태어난 이상이 16살 때 완공된 조선총독부 건물을 보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상은 근대를 숭상하는 만큼 끊임없이 거기에서 탈주하고자 했다. 근대가 얼마나 강한 빛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그늘에도 민감했다. 이상 문학의 아이러니, 위트, 패러독스는 바로 이 빛과 그늘의 이중주에서 나온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그토록 현대문명에 시니컬할 수는 없었으리라. 이 시니컬은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실망하는 데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건 눈부신 실망이다. 이후 사회,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근대적 제도 앞에서 시니컬해지는 그 어떤 한국 문학도 이 실망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활로는 시니컬이 아니라 그 반대쪽에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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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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