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5.05.06 22:00 수정 : 2015.05.07 10:31

그림 이부록 작가

[매거진 esc] 김연수의 ‘소년이로다’
대학 입학 후 시작한 서울생활…서울에서 나는 영원히 여행자로 지내고 싶었다

김천은 나의 고향이다. 경부선이 깔리면서 역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20세

기의 도시다. 그다지 크진 않지만, 원한다면 질리도록 기차를 바라볼 수 있다. 요컨대 교통의 요지라는 뜻이다. 철길은 남북으로 이어져 있다. 그 철길을 따라 북쪽 끝까지 가면, 서울이 나온다. 소년 시절, 나는 시간이 날 때면 북행 기차를 보러 갔다. 자전거를 타고 시가지를 벗어나면 철길을 따라 황혼에 물드는 논들이 보였다. 저물녘의 기차는 불을 환하게 밝힌 채, 그 풍경 너머로 떠났다. 그럴 때는 비둘기호마저도 반짝반짝 빛을 내는 것 같았다. 고교 시절, 내 꿈은 그 기차를 타고 고향을 떠나는 것이었다.

몇년 뒤, 나는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에 합격해 북행 기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서울을 처음 가는 건 아니었지만, 살기 위해서 가는 건 처음이었다. 서울에서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금방 알게 됐다. 그건 먼저 방부터 구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서울성곽 바로 아래의 캠퍼스에는 기숙사를 지을 만한 공간이 없었다. 아름드리 은행나무 그늘 아래, 옛 성균관 건물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건 유학과 학생들의 특권이었다. 신입생 시절에 내가 A+를 받은 과목은 유학이 유일했으나, 영문학과 학생에게 돌아갈 몫은 마루 한쪽도 없었다.

그래서 수강신청보다도 방 구하는 일이 더 시급했다. 아버지가 수유리에 살던 친척 누나에게 시외전화를 넣어 도움을 청했다. 꼭지누나라고 했다. 그 이름 때문에 나는 뵙기 전부터 그 누나가 좋았다. 그러나 막상 만나 보니 꼭지누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아들을 둔 중년 부인이었다. 결혼하자마자 상경해 갖은 고생 끝에 수유리에 정착한 분이라 서울의 셋방 사정에 밝았다. 꼭지누나는 명륜동은 방세가 비싸니 아리랑고개 쪽으로 가보자고 제안했다. “아리랑고개라고요?”라고 내가 되물었다. 꼭지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꼬부랑할머니가, 꼬부랑고갯길을, 꼬부랑꼬부랑, 걸어가고 있네. 5번인가 5-1번인가, 시내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가는 동안, 그런 노래가 내 귓가에 울렸다. 내가 아는 서울은 점점 더 멀어졌고, 꼬부랑꼬부랑, 그렇게 내 마음도 조금씩 꼬이기 시작했다. 아리랑고개는 생각만큼 구불구불한 고갯길은 아니었다. 조용한 동네였고, 복덕방에서 보여주는 방들도 한옥에 딸린 것들이나마 널찍널찍했다. 하지만 나는 꼭지누나에게 다시 명륜동으로 가자고 말했다. 방값이 차이가 난다고 했지만, 계속 고집을 부렸다. 왜 그랬을까? 그로부터 6개월 흐른 뒤였다면, “거기서는 남산타워가 보이지 않잖아요”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꼭지누나는 명륜동은 방세가 비싸니
아리랑고개 쪽으로 가보자고 했다
“아리랑고개라고요?”
꼬부랑할머니가, 꼬부랑고갯길을
그런 노래가 내 귓가에 울렸다

고향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던 8월 말의 저녁이었다. 기차가 한강철교를 건너자 오른쪽으로 남산타워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올려다보자, 모든 게 분명해졌다. 거긴 타지이고, 나는 집을 떠난 여행자이니, 그 타워 아래에 있을 때 어디에 있든 나는 임시의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이. 남산타워 아래, 잠정적인 관계 속에서 겨우 존재하는 일시적 거주자. 서울에서 산다는 것이 최종적으로 내게는 그런 뜻이었다. 그렇게 기차에서 내려 서울역 광장으로 나오자, 모든 게 새롭게 다가왔다. 대우빌딩의 불빛도, 신문과 잡지를 사라는 외침도, 오뎅 국물에서 피어나는 김도, 공회전하는 택시가 뿜어내는 매캐한 냄새도. 서울에서 나는 영원히 여행자로 지내고 싶었다.

항구적인 주소지가 없던 내게 서울은, 한쪽을 움켜쥐면 온몸이 꿈틀거리는, 살아 있는 짐승의 맨살과 같았다. 가두시위가 격렬해지는 날이면, 종로와 충무로와 을지로에 축포처럼 최루탄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다음날이면 살수차가 아스팔트에 물을 뿌리며 지나갔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노점상들은 다시 거리를 메웠다. 서울에서 제일 흔한 건 사람이었던지라 청계천의 야바위꾼과 약장수 들은 호객의 기술을 따로 익힐 필요가 없었다. 서울의 거리는 신사와 사기꾼을, 반정부인사와 고문경찰을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고향과 달리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은 때로는 다정했고, 때로는 비열했다.

그즈음, 나는 성북동 언덕 아래의 하숙집 3층에 살고 있었다. 이따금 아래층에서 전화를 받으라는 소리가 들렸다. 대개 친구의 전화였다. 이십대 초반의 잠정적인 관계, 그러니까 친밀과 소원 사이를 정처없이 오가는 누군가. 이십대 초반이니 어김없이 착시가 일어났다. 무엇을 배경으로 놓고 보느냐에 따라서 관계의 성격이 달라졌으니까. 이십대 초반에는 외로움을 배경으로 관계를 바라본다. 그러다 보니 소원하다는 말은 상대의 반응이 나만큼 친밀하지 않을 경우를 뜻하기도 했다. 요컨대 이십대 초반에게는 관계의 친밀과 소원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게 누구든,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저녁은 언제나 생각보다 가슴이 설??? 내가 그토록 그 전화를 기다렸던가 싶어 혼자서 놀라며 혜화동으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언덕길을 올라가다 보면, 어느 지점부터인가 남산타워가 눈에 들어왔다. 그 언덕길에서 남산타워가 나타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용산을 지나는 기차에서 올려다볼 때와는 또 달랐다. 넌 지금 여기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수많은 일들을 경험할 거야. 잊지 못할 정도로 행복한 순간도 있겠지만,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도 있을 거야. 그 어떤 경우라도 이게 너의 여행이라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어. 그게 바로 서울의 일시적 거주자에게 남산타워가 전하는 말이었다.

서울에서 여행자로 지내고 싶다는 소원은 반만 이뤄졌다. 대학을 졸업한 뒤, 나는 서울을 떠나 일산에 영구적인 주소를 갖게 됐다. 거기서는 아무리 눈을 치켜뜬다고 해도 지금 여기는 타지이며, 나는 여행자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게 잘 안 보인다. 게다가 올해로 일산에서 산 지 21년째가 되는데, 이 말은 곧 고향인 김천에서 산 기간보다 일산에서 산 기간이 더 길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덕분에 서울은 여전히 내게 스쳐가는 곳이지만, 남산타워는 그 이름이 바뀐 뒤부터 예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언제부턴가 나는 거기 남산타워가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09년 가을, 슬픈 일이 생겼는데 어디 갈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문득 남산타워가 떠올랐다. 혜화동 언덕길에서 문득 남산타워가 눈에 들어오듯. 남산타워로 갔다. 아직도 케이블카가 있는지 궁금했는데 그대로 있었다. 관광객들과 함께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철망에 빼곡하게 붙은 자물쇠의 이름들을 구경하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까지 올라갔다. 케이블카에서도, 전망대에서도, 심지어는 자물쇠의 글자들에서도 슬픈 표정은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회전전망대에서 관광객들은 다들 즐거운 표정으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김연수 소설가
그들처럼 나도 낯선 풍경인 양 서울을 내려다봤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남산타워에 그토록 끌렸던 까닭은, 아마도 그래서였으리라는 것을. 거기 서울에서는 온갖 일들이 벌어져 누군가는 거기가 천국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뻐하고 누군가는 지옥에 떨어진 죄인처럼 괴로워할 테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남산타워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대한 눈동자처럼 서 있었기에. 인생이 여행이라도 되는 양, 짐짓 여행자처럼, 그 모든 기쁨과 고통을 바라보는, 그러나 더없이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눈동자. 그런데도 때로는 그 눈동자를 흉내내는 것만으로 위로받는 경우가 있다. 그 가을의 내가 꼭 그랬다.

김연수 소설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esc : 김연수의 ‘소년이로다’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