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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부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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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연수의 ‘소년이로다’
컬러티브이의 등장과 함께 지나온 유년의 시간들…브라운관 속 삼원색 점들은 어떻게 환상을 구성했나
1979년 10월26일, 나는 ‘서거’라는 말을 처음 배웠다. 더불어 대통령이 죽기도 하며, 더욱 놀랍게는 누군가 그를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도. 여러 징후들이 선행했다고 하더라도 한 세계가 바뀌는 역사적 사건에는 구성원들이 “정말 그럴 줄은 상상조차 못했어” 같은 소회를 앞다퉈 털어놓는 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온갖 일들이 반복된 역사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려면, 기존의 어떤 상상도 초월하는 사건이어야만 하니까. 그러니 그게 자신의 일이든 사회의 일이든 앞날을 예언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예언되면 그건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나중에나 했던 것이고, 그때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내가 알긴 뭘 알았겠는가? 동네 형들을 따라 시청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가서 죽은 대통령을 위해 묵념을 올리기도 했지만, 사실은 좀 당황한 상태였다. 추모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는데, 아무리 해도 다른 사람들처럼 눈물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사진 속의 그 사람에게 감정이입하려고 해도 도무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도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의 얼굴은 오로지 흑백으로만 떠오른다는 사실.
아직 국내 방송사에서는 컬러 시범방송을 시작하기 전이었으니까 금성사 대리점 진열창에 컬러티브이가 놓인 건 그해 말이나 그 다음해 초가 아니었나 싶다. 화면조정 시간의 패턴마저도 그게 컬러라는 이유만으로 구경거리가 됐으니까 저녁마다 실제 방송을 보여줄 때는 그 앞에 구경꾼이 잔뜩 모여 있었다. 신학기면 담임선생이 “집에 티브이 있는 사람 손들어 봐!” 같은 말을 하던 시절인지라 매일 저녁 구경꾼이 몰려든대도 신기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 티브이에서는 우리보다 먼저 컬러방송을 시작한 일본 방송이 나왔다.
그러다가 컬러티브이가 하나도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을 무렵, 한국에서도 컬러방송이 시작됐다. 그게 1981년의 일이니, 컬러티브이란 제5공화국의 탄생과 궤를 같이하는 셈이다. 한국 현대사와 관련한 역사책을 쓴다면, 나 역시 1980년대 초반을 어떤 전망도 보이지 않았던 엄혹한 시절로 묘사하겠지만, 막상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가면 십중팔구 나는 컬러티브이를 시청하면서 새우깡을 집어먹는, 매우 행복한 소년 시절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정부의 문화 정책 자체가 의도하기도 했지만, 정치와 문화의 이런 괴리 현상은 제5공화국의 특징이었다.
나는 종종 브라운관에 눈을 대고그 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수많은 삼원색의 점들만 보였지만
다시 눈을 떼면
대통령의 단호한 얼굴이나
시위대의 폭력장면이 나타났다 아무리 작은 틈이라도 일단 균열이 시작되면 이전의 매끈한 상태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이 괴리는 1980년대가 끝날 무렵에는 상당한 문화 지체 현상이 되었고, 그 때문에 제5공화국은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티브이를 열심히 보면 독재체제가 붕괴한다는 이 이론은 지금도 유효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디브이디를 실은 풍선을 북한으로 날려보내는 게 아니겠는가, 마는 1982년의 내가 일요일 아침마다 <은하철도 999>를 본방사수한 것 역시 신군부의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서였다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그 만화영화는 인생이란 끝없는 암흑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엄마 잃은 고아의 처지와 다를 게 없다는 염세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다가 ‘그래도 희망이 있어 오늘도 우리는 살아간다’는 식의 내레이션으로 급수습하면서 매 에피소드를 이어갔는데, 어쩐지 그런 하나 마나 한 희망의 끝은 과연 무엇인지 궁금했을 따름이었다. 결국 그 기나긴 여정의 끝에서 <은하철도 999>는 기계인간으로서의 영생보다는 죽어야만 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에 방점을 찍는데 이는 안드로메다에서 다시 개념을 탑재한 철이가 궁극의 염세를 실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반테크놀로지와 휴머니즘을 옹호한다는 뜻이었다. 1980년대 초반의 이런 반테크놀로지는 꽤 대중적이었다. 1999년 지구가 멸망한다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남북통일 등 큰 변화가 일어난다는 소설 <단>의 예언 등, 그 시절에는 동서고금의 비결들이 많이 출판됐는데, 크게 보면 이 유행 역시 반테크놀로지의 연장선에 있었다. 그러나 내 주위에서 발견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가 하도 소박하다 보니 그런 주제가 실감나진 않았다. 1983년 여름방학 때, 나는 서울 코엑스 앞 허허벌판에서 열린 ‘83로보트과학전’을 보러 갔는데, 녹음된 인사말을 아이폰 스피커보다도 더 질 낮은 스피커로 재생하며 나를 환영하던 로봇보다는 3분 만에 면이 익는다는 공터 노점의 컵라면이 더 가능한 미래 같았으니까. 1980년대 초반의 이 반테크놀로지 정서를 반박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백남준이었다. 내 기억 속에 백남준은 지구를 거꾸로 돌려서 사랑하는 여인을 되살린 슈퍼맨에 버금가는 일을 한 예술가였다. 1984년 1월1일, 그는 조지 오웰이 예언한 디스토피아는 결코 도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뉴욕과 파리와 서울 등의 방송사들을 실시간으로 연결해서 지구를 하나의 시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전세계의 모니터들을 서로 연결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했다고 한다. 그 결과는 바로 지구촌이라는 신조어의 등장이었다. 몇년 뒤, 지구촌이라는 구수한 표현은 세계화라는 목표지향적인 경제용어로 바뀌었고, 수입 농산물의 저가 공세에 속절없이 무너진 농민들이 제일 먼저 그 말의 뜻을 몸소 경험했다. 기술은 중립적으로 등장하지만, 편파적으로 관리된다. 마찬가지다. 티브이 역시 실재를 재현하기 위해 등장했지만 곧 환상을 구성하는 것으로 관리됐다. 집에 컬러티브이가 생긴 뒤, 나는 종종 브라운관에 눈을 바짝 대고 그 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면 빨강과 파랑과 녹색으로 이뤄진 수많은 삼원색의 점들만 보였지만, 다시 눈을 떼면 대통령의 단호한 얼굴이나 시위대의 폭력장면이 나타났다. 컬러티브이의 영상은 사실 삼원색으로 구성된 환영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티브이에다 선사(Zen Master)라는 이름을 붙인 점만은 백남준이 옳았다. 컬러티브이는 내게 색즉시공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친 최초의 스승이었다. 선방의 화두를 흉내내자면, 컬러티브이에게 나는 태어나기 이전에 너는 무엇이었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 테크놀로지 선사는 내게 이런 광경을 바로 보여줬을 것이다. 검은 어둠 속에서 하얀색으로만 표현된 불꽃이 너울대는 장면을. 내 흑백의 기억 속, 1980년 5월의 어느 밤, 광주엠비시 사옥은 그렇게 불탔다. 그 불길은 티브이가 아니라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구성된 환상에 대한 분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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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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