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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부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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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연수의 ‘소년이로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메일과 메구, 육체의 소진과 예정된 청년의 실패
몇 년 전, 제주도 협재의 한 식당에서 저녁식사로 갈치조림을 먹으려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스무살 그 언저리에 알고 지낸 이의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나타났다. 조용하게 지내고 싶어 찾은 곳이었던지라 나는 잠시 망설였다. 전화벨은 혼자서 계속 울었다. 더 들어보니 어쩐지 벨소리의 결이 다르게 느껴졌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서울의 그 사람은 내게 우리가 아는 어떤 사람이 위암에 걸렸는데 그 사실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몰랐다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갈치조림은 잔뜩 쫄아 있었다. 양념에 파묻힌 흰 살점을 젓가락으로 깨작거렸다. 나는 정말 몰랐다. 우리의 삶이 이토록 빨리 죽음 쪽으로 내몰리게 될 줄은. 이십여년 전, 신입생으로 서울의 한 대학에 유학 온 나였다면 더군다나. 그때는 청춘의 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는 무조건 좋아지리라 믿었다. 장차 소설가가 될지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시간이 흐르면 더 나은 사람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우리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이십여년이면 충분했다. 그 이십여년 동안, 세상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졌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뒀기 때문이 아니라 그토록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세상 속의 우리를 만나게 되니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 명백한 실패를 경험하고서야 나는 이 실패는 인류가 존재한 이래 수없이 반복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이 멈춰 있지 않는 한, 청춘의 푸른 꿈에 실패는 예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제아무리 마음만은 청춘이라고강변한들 무의미하다
그저 건강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과잉의 육체를 지녀야만
청춘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육체의 불변을 전제로
청년들의 세계는 기획된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 시절의 나는 가방에 카를 마르크스와 무라카미 류를 되는대로 쑤셔넣은 채 서울 시내를 쏘다녔다. 두 사람의 책은 1980년대 내내 금서였다. 마르크스의 책이야 국가 체제를 바꾸는 방법을 청년들에게 가르치니 당연했지만, 1976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가 번역, 출판되자마자 판매금지와 압수처분을 당한 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1990년에 예하에서 출판된 번역본에 소설가 박인홍이 쓴 해설에 따르면, ‘미풍양속을 해치는 외설물’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2015년의 관점에서 돌이켜보면 활자뿐인 소설이 아름답고 건전한 풍속을 해쳐봐야 얼마나 해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마약 남용 및 환각 상태에서의 그룹 섹스와 잔인한 폭력 등의 소재가 이제는 더이상 충격적이지 않을뿐더러 굳이 보겠다면 영화 쪽을 권하고 싶으니. 그럼에도 이 소설에는 외설물 그 이상의 불온한 주제가 숨어 있어 지금도 읽을 만하다. 마르크스가 청년들의 혈관에 뜨거운 피를 수혈했다면, 류의 이 소설은 그 피를 마음껏 탕진하라고 말하고 있달까. 이 소설이 국내에서 판매금지된 직후인 1977년 3월, 정부는 새 국민체조법 12가지를 만들어 각 학교에 보급했다. 내가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였다. 그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89년까지 나는 정기적으로 스피커 속 남자의 구령에 맞춰 국민체조를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날마다, 그 뒤로도 체육시간이면 어김없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경희대학교 유근림 교수였다고 하는데, 그분이 ‘국민체조 시이작’이라고 외치면 나의 두 팔은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나 저절로 앞을 향하고 만다. 그럴 때 내 몸의 일부는 국민이 되고, 그건 국가의 자산으로 편입된다. 바로 그 국가의 자산인 청년의 육체를, 마치 저주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탕진하는 일. 그게 바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참된 주제이니까 정부가 이 소설을 판매금지시킨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1990년 다시 출판된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슬픔을 느꼈더랬다. 너무 외설적이라 오랫동안 숨어서 읽는다는 소설을 마침내 읽었는데, 슬픔이라니…. 그 당시에는 이 슬픔을 나는 해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문장이 아름답기 때문에, 혹은 자신을 학대하는 청춘들이 안쓰러워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슬픔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알겠다. 주인공인 류가 소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옛날에는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텅 비었으니까.” 류는 지금 청춘이 빠져나간 육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전에는 마약에 취한 채 그룹 섹스를 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과잉의 육체만 눈에 들어왔지, 그 육체의 텅 빔에 대해서는 눈길이 가지 않았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처럼 제멋대로 탕진하지 않는 한, 세월이 흘러야만 경험할 이 육체의 소진에 대해서 내가 시큰둥한 것은 당연했다. 류의 말을 들은 오키나와가 “그런 노인 같은 소리 작작해, 류. 경치가 신선해 보인다니, 그건 일종의 노화 현상이야”라고 말할 때, 이 핀잔은 적절했다. 노화 현상이란, 시간이 흐르면 과잉의 육체는 저절로 소진된다는 사실을 뜻한다. 제아무리 마음만은 청춘이라고 강변한들 무의미하다. 그저 건강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과잉의 육체를 지녀야만 청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겨우 이십년쯤이면 이 과잉의 육체들은 예외없이 소멸된다. 이 육체의 불변을 전제로 청년들의 세계는 기획된다. 그러니 실패는 불가피하다. 유사 이래 청년들은 모두 이 실패를 반복했고, 이제 우리도 마찬가지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벌거벗은 채 너부러져 있던 일행과 함께 경찰서에 다녀온 류가 히비야 야외음악당에서 옛 친구 메일을 만나는 장면이다. 음악다방에서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만 나오면 양손을 벌리고 빙빙 돌던 메일은 류에게 교토에서 오르간 연주를 시켜달라고 찾아온 메구라는 여자애를 기억하느냐고 묻는다. 류가 이사 간 뒤, 메일은 그 여자애랑 같이 살았다. 메구가 아직 도쿄에 있느냐고 묻자, 메일은 종아리의 화상 자국을 보여준다. 불이 난 것은 실수였다고 메일은 말하지만, 그건 필연적인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메일과 메구는 아파트에서 춤추고 있었는데, 난로의 불이 메구의 스커트로 옮겨붙었다. 순식간에 메구의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마치 초자연적인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해 자연발화한 육체처럼.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의 육체는 그렇게 불이 붙은 상태다. 과잉의 육체에 불이 붙으면, 그 몸은 소진할 수밖에 없다. 소진, 그러니까 흔적도 남지 않을 때까지 불타버린다는 것. 그리고 이어지는 메일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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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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