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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7.29 19:04 수정 : 2015.07.30 14:05

그림 이부록 작가

[매거진 esc] 김연수의 ‘소년이로다’
세상이 고요해지는 시간 잠들지 못한 단 한 사람을 위한 목소리, 심야 라디오

몇 달 전, 새벽 세시의 라디오에서 너무나 평범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놀란 적이 있었다. 대학가의 카페에 앉아 있노라면, 옆 테이블에서 들려올 만한 보통의 연애담이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사랑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은 이야기. 유명인의 멋진 사랑 이야기라면 그냥 꺼버렸을 텐데, 대단찮은 이야기라 오히려 더 솔깃했다. 처음에는 떨리던 목소리도 시간이 흐르면서 차분해졌고, 이야기도 점점 진솔해졌다.

방송이 끝나갈 즈음에야 그게 일반인이 일일 디제이(DJ)로 참여하는, ‘심야 라디오 디제이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이라는 걸 알게 됐다. 특별할 게 하나도 없었던, 오히려 그래서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그 뒤로 계속 들어보니 교사, 만화가, 회사원, 대학생, 주부 등이 날마다 마이크 앞에 앉아서는 자신의 꿈을 얘기하고 누군가를 추억했다. 어쩌면 이뤄질 수 없는 꿈들에 대한 이야기여서, 남들에게 들려주기에는 너무나 평범하고 사소한 이야기여서, 사랑했던 사람을 영영 잃어버린 이야기여서 그들의 목소리는 때로 한없이 낮아졌다.

새벽 세시가 아니었다면, 그런 프로그램이 송출되는 일은 없었으리라. 일산 호수로 교차로가 보이는 내 책상에서 바라볼 때, 새벽 세시는 세상이 가장 고요해지는 시간이다. 그 시간이면 신호등의 색깔에 따라 파도소리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자동차들의 소리가 뜸해진다. 시끄럽고 북적대는 세상의 대척지에 와 있는 것과 같으니 글을 쓰기에는 가장 좋다. 글쓰기 가장 좋을 때의 나는 가장 고독한 나다. 작가를 꿈꾼다면, 피할 수 없는 고독이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다. 작가가 아닌 다른 것을 꿈꾼다고 하더라도 고독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게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미래든,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든,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한때든. 새벽 세시에 라디오를 켜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잠들었다고 해도 심야 라디오는 방송되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듣고 있다면. 그게 바로 심야 라디오의 본질이리라. 한 사람을 위한 목소리처럼 들린다는 것. 그래서 그 목소리가 나보다 더 고독하게 느껴진다는 것.

최근에 출간된 소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에는 나치 시절 독일의 고아 소년 베르너가 쓰레기장에서 주운 고장난 라디오를 고쳐서 여동생과 몰래 듣는 장면이 나온다. 라디오를 켜자 단파대로 누군가 ‘즈’와 ‘스’가 잔뜩 들어간 생경한 언어로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베르너는 헝가리어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헝가리는 여기서 얼마나 멀어?” 여동생의 물음에 베르너는 말한다. “수천 킬로미터쯤?” 둘은 그렇게 라디오에서 들리는 낯선 도시의 이름을 받아 적는다. 베로나, 드레스덴, 런던, 로마, 파리, 리옹. “야밤의 단파대. 길을 거니는 사람과 꿈꾸는 사람, 미친 사람과 고함치는 사람들의 세상.”

새벽 3시의 라디오
너는 말하고 나는 듣는다
검은 밤을 떠다니는 마음에
이것은 암흑 속의 빛, 기적

그 장면을 읽으며 나는 1980년대 중반, 내 방에 놓여 있던 라디오를 떠올렸다. 이 세상에 내가 듣지 못한 음악이 그토록 많다는 것에 무한한 기쁨을 느끼며 나는 새벽 1시부터 하는, 전영혁씨가 하던 프로그램에 빠져 있었다. 한국 노래 아니면 영어 노래 일색이던 낮 방송과 달리 그 시간에는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에서 만든 음악이 흘러나왔다. 도저히 제목을 받아적을 수 없어 들리는 대로 한글로 받아 적으며 나는 그 먼 나라들을 떠올렸다. 제스로 털의 ‘엘러지’를 배경으로 전영혁씨가 한편의 시를 읽어주며 방송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 먼 곳을 향한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느껴졌다.

그다음에는 경직된 목소리의 남자가 나와서 “여기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라든가, 뭐 그런 멘트와 함께 애국가를 들려줬다. 그렇지만 그 밤에 혼자 일어나 경례를 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나는 기껏해야 고등학교 1학년이나 2학년이었고, 눈만 감으면 언제든 잘 수 있었으니까. 때로는 애국가까지 듣지도 못하고 잠드는 날도 있었다. 그러면 아침에 다른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깨곤 했다. 아침 라디오에서는 늘 맨손체조에 구령을 붙이는 체육 선생님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심야 라디오와 아침 라디오는 서로 다른 나라에서 송출되는 듯했다.

때로는 애국가가 끝나고 백색 소음이 시작되고 난 뒤까지도 잠들지 못하는 날이 있었다. 그런 밤이면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내 마음이 검은 밤 위를 둥둥 떠다녔다. 그런 밤이면 나는 모든 방송이 끝났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라디오를 켜고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목소리를 찾았다. 새벽에는 낮에는 들을 수 없는 소리들이 많이 잡혔다. 윙윙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목소리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를 반복해서 제대로 들을 수 없는 방송은 북한에서 송출되는 것이었다. 방해 전파는 중국 방송이나 일본 방송에는 관대했다. 우리 쪽에서 북쪽을 향해 송출하는 방송에는 ‘흑룡강성’이니 ‘길림’이니, 그런 낯선 지명에 사는 친척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흘러나왔다.

그날도 아마 잠 못 드는 밤 중 하나였을 것이다.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를 듣고 있었다. 그 순간, 베르너에게 헝가리어가 들리듯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언어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그건 러시아어였다. 물론 나는 러시아어를 단 한마디도 몰랐으나 그 말만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아마 라디오 속 목소리의 주인공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사는 남자인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상상했다. 무엇도 상상할 수 없었다. 무엇도 상상할 수 없는 도시에 사는 한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단지 그는 말하고 나는 듣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라도 나 역시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었다. 깊은 밤, 떠다니는 마음이란 바로 그런 마음이었다. 심야 라디오는 바로 그런 마음의 소유자를 향한,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방송이다.

소설 속 베르너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스위스의 민담학자 막스 뤼티는 1960년대 초반 베로뮌스터 라디오 방송에 나와 일반 청취자들에게 유럽 민담들의 특징을 설명했다. “아직 라디오도 없고 책도 없는 옛날에는 저녁때면 모여서 이야기를 들었다”라고 말할 때, 그는 이야기가 지닌 치유의 힘을 믿고 있었고, 이제는 책과 더불어 라디오가 바로 그 일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라디오로 방송된 일련의 강연은 <옛날 옛적에>라는 책으로 출판됐다.

그 책 199쪽을 펼치면 제2차 세계대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던 1960년대 초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의미를 설명하던 노학자의, 다음과 같은 말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광경이 떠오른다. “암흑 속의 빛(Lux in tenebris). 이것이 세상에서 기적이 갖는 의미다. 기적은 어둠 속의 빛으로서 민중과 작가의 표상 속에 살아 있다. 왜 우리는 성탄절 밤에 촛불을 켜는가? 우리는 그 빛을 그 밤에 일어났던 기적의 상징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모든 민족의 종교와 문학은 빛의 상징을 알고 있다.”

김연수 소설가
암흑 속의 빛. 그건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빛이다. 그렇기에 기적이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의 베르너처럼 깊은 밤, 심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목소리에 단 한번이라도 귀를 기울여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것이다.

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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