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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8.26 19:27 수정 : 2015.08.27 15:07

그림 이부록 작가

[매거진 esc] 김연수의 ‘소년이로다’
저녁을 먹다가 밖을 보면 붉은 지붕들과 멀리 테주강이 보였다…취기와 함께 까닭모를 노스탤지어가 느껴졌다

리스본의 밤. 바이루알투의 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으며 파두 공연을 한 차례 보고 난 뒤 처마 아래에서 콘스탄틴에서 왔다는 독일 청년과 나란히 서서 담배를 피웠다. 10년 전의 일이다. 그 청년은 내게 파두, 재미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주말에 한번 신나게 놀아보려고 친구들과 리스본까지 왔는데 노인들이나 부르는 저런 구닥다리 노래를 듣고 있으려니까 자신이 한심해서 미치겠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위로의 말을 전할밖에.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리스본이 너무 좋았으니까.

리스본에 가기 전부터 나는 리스본이 좋았다. 발단은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소설이었다. 외국 소설을 읽을 때 주로 하는 짓인데, 나는 주인공이 내린 산타아폴로니아역의 위치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동선을 확인하려고 구글 어스를 실행한 채 독서를 했다. 그러다가 그만 중심가의 좁고 긴 언덕길을 요리조리 빠져다닌다는 노란색 28번 트램 사진을 보게 된 것이다. 나는 수첩에 “리스본에 가서 노란색 28번 트램을 타보자”라고 썼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리스본에 가게 됐을 때, 나는 28번 트램이 다니는 곳과 가까운 숙소를 구하기로 했다. 예약하고 보니, 숙소의 이름은 리스본 포에츠 호스텔.

여전히 성업중인 것으로 보이는 이 호스텔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지피에스 좌표와 함께 그 호스텔을 찾아가는 여러 방법에 대한 설명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비행기로 가든, 기차로 가든, 버스로 가든 마지막은 항상 똑같다. “(포르투갈의 유명한 작가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동상 위쪽을 올려다봤을 때 모퉁이 건물 5층에 우리가 있습니다.” 난 28번 트램이 타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어느 틈엔가 리스본 문학기행을 하게 된 셈이었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동상은 포르투갈 문학의 중심지였던 카페 브라질리아 앞에 서 있으니까. 호스텔에 들어가니 방마다 랭보, 아도니스 등 시인들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여긴 어딘가? 리스본은 작가들의 천국인가?

리스본을 그리워한다는 것
마드레데우스의 파두 음악을 들으며
노란색 28번 트램을 타고
골목의 집들을 바라보면 알거야
다시 돌아와야만 현실이 되는 꿈
돌아오지 못해 영영 꿈이 된 현실을

리스본 국립도서관에 갔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작가가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는 책을 열람하려면 회원등록을 한 뒤 열람카드를 사야만 했다. 그 카드로 로그인해 책을 검색해서 대출을 신청하고 읽을 자리를 지정했다. 그다음에 300명쯤 들어갈 수 있는 천장 높고 근사한 대형 열람실의 해당 좌석에 앉아 있으면 사서가 수레를 밀면서 다가와 책을 슬그머니 책상에 올려놓았다. 열람실이나 책을 건네는 방법이나 근사하지 않은 게 없었다. 거기, 국립도서관에서의 독서를 더욱 멋진 일로 만드는 건 머리가 허연 사서 할머니들이었다. 청소년소설에 나오는 사서 할머니들 같았다.

리스본에서는 노인들이 결여된 존재처럼 보이지 않았다. 파두 공연을 하던 할아버지들도 그렇고, 사서 할머니들도 그렇고. 리스본에 머무는 동안 나는 28번 트램을 타고 가다가 내키는 곳에서 내려서 골목을 걷곤 했다. 그러다가 다리가 아플 즈음이면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리스본식 에스프레소인 비카를 주문했다. 그 자리에 서서 단숨에 비카를 들이켜고는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게 리스본식이었지만, 나는 시간 많은 여행자였으므로 사람들로 가득한 실내 한쪽에 앉아서 마셨다. 그럴 때면 왁자지껄 떠드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을 흔히 찾을 수 있었다. 한때의 나와 같았던 젊은이들, 언젠가는 내 모습이 될 노인이 서로에게 보이는 카페라는 게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테주강의 물결처럼, 도도한 시간의 흐름 앞에서 인간의 인생은 그처럼 짧은 것이기 때문일까? 리스본에서는 까닭 모를 노스탤지어가 자주 느껴졌다. 혼자 여행하던 내게 가장 좋은 음식이란 소시지로 속을 채운 바게트빵이었다. 바게트와 소시지 종류가 다양해서 골라 먹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그렇긴 해도 식당 밥이 그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며칠 뒤, 더 참지 못하고 해산물을 파는 식당들이 늘어선 코메르시우 광장으로 나갔다. 거기서 여행자의 수업료를 충분히 치른 뒤에야 나는 바이루알투의 골목 여기저기에 허름한 식당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 식당에는 중년남자들이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축구를 보면서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기대했던 바로 그런 식당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저녁을 먹다가 밖을 내다보면 거기 언덕 아래로 붉은 지붕들과 멀리 테주강이 보였다. 취기와 함께 해가 저물면 리스본은 내게 전혀 낯설지 않았다. 노스탤지어의 원인은 그것이었다. 리스본은 나와 닮았다는 것. 그러므로 리스본을 떠나기 전부터 나는 리스본을 그리워할 운명이라는 것. 리스본에 있으면서 리스본을 그리워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다면, 포르투갈의 파두 그룹인 마드레데우스(Madredeus)의 음반 ‘아인다’(Ainda)를 들어보시길. 알파마에서 벨렘까지, 다시 반대 방향으로 하루종일 28번 트램을 타고 다니면서 나는 이 음반을 반복해서 들었다. 스쳐가는 리스본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 음반을 듣던 그 순간, 나는 진정한 여행자가 됐다. 그러니까 지금 있는 곳을 포함해서 세상 모든 곳이 그리운 사람이.

차남들의 세계사라는 말이 있다. 아버지의 집과 땅을 물려받을 장남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현실에 순응하고 살면 된다. 하지만 차남들은 스스로 살 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대항해시대에 차남들은 신대륙이나 아시아로 가는 배에 올라타 자신의 운을 시험했다. 성공해서 돌아오면 그걸로 좋고, 돌아오지 못해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장남이 있으니까. 세계사는 그렇게 살아서 돌아온 차남들에 의해 전개됐다는 이야기. 어쩐지 그럴듯하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돌아오지 못한 차남들에게 더 마음이 간다. 운 좋은 사람이란 정말 드문 것이니까. 한 사람이 성공했다면, 수천명이 실패했다고 봐야겠지.

김연수 소설가
내게 리스본은 차남의 도시처럼 느껴진다. 이건 리스본의 골목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에 이르러 느껴지는 노스탤지어의 원인이 되는 이야기다. 거기 돌아오지 못한 차남들이 수없이 많았으리라는 것. 그리고 그들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지녔던 꿈을 증명한다는 것. 비옥한 농토, 주일마다 찾아가는 성당, 따뜻한 불 옆에 모여 앉은 아내와 아이들. 배에 오를 때 그들이 꿈꾼 미래는 그런 모습이었으리라. 다시 돌아와야만 현실이 되는 꿈. 다시 돌아오지 못해서 영영 꿈이 된 현실. 마드레데우스의 노래를 들으며 28번 트램에 앉아 골목의 집들을 바라보는 동안, 그렇게 현실을 잃어버린 자들에게나 어울리는 감정이 내게 밀려왔다 밀려갔다.

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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