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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부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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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연수의 ‘소년이로다’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인간은 임시적 존재…실수하지 않는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작가에게는 무척이나 뜨거웠던 이번 여름을 지나는 동안, ‘애당초 나는 왜 문학에 끌렸던 것일까’라는 질문이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아침, 일산 호수공원을 달리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거기 하늘은 푸르렀고 구름은 하?R다. 그리고 그 푸른빛과 흰빛 사이에서 아침 햇살이 주홍빛 파문처럼 번져나고 있었다. 새삼 내가 사는 이곳이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 내가 여기에서 영주하는 자가 아니라 잠시 머무는 자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지구와 태양이 있는 한 아침 햇살은 영원히 반복되겠지만, 나는 곧 사라진다. 이 시간적 대비가 영원히 반복될 아침 햇살을 순간적으로 아름답게 만든다. 바꿔 말하면 아름다움의 경험은 여기에서 나는 영주할 수 없는 존재, 그러니까 임시적 존재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향유하고 탐닉하는 한, 나는 임시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젊었을 때, 나는 착각을 일깨우는 시와 소설을 접할 때마다 경이로움을 느꼈고, 그때마다 나는 더욱더 임시적 존재가 됐다. 지난 계절, 내 공부 주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임시적 존재로 되돌아가기.
인터뷰 모음집인 <보르헤스의 말>을 펼쳤더니 거기에는 “내 삶은 실수의 백과사전이었어요. 실수의 박물관이었죠”라거나 “사람들이 나를 너무 부풀려놓았어요. 나는 몹시 과대평가된 작가예요”, 혹은 “최선을 다했어요. 하지만 아는 게 별로 없어요” 같은 말들이 가득했다. 나는 그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고 밑줄을 긋는다. 사람들은 이게 보르헤스의 의뭉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는 진지하다. 그라면 “경험이란 우리의 실수가 쌓인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라는 이디시어 속담을 알 테니까.
폴 오스터 역시 우리가 실수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작가다. <브루클린 풍자극>에는 환갑이 다 되어서 죽을 장소를 찾아 자신의 고향인 뉴욕 브루클린으로 되돌아가는 남자가 등장한다. 이 남자는 남몰래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책>을 쓰고 있는데, 거기에는 한 인간으로서 길고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오는 동안 저질렀던 모든 실수와 잘못과 바보짓, 그리고 모든 무의미한 행동을 단순하고도 분명한 언어로 그려 낼 계획이었다.
이 남자가 저지른 가장 어리석은, 혹은 가장 현명한 행동이라면, 그건 아마도 죽을 장소를 찾아 곧 3천명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테러가 예정된 브루클린으로 간 일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남는다. 누군가가 “내 삶은 실수의 백과사전이었어요”라고 말한다면, 그는 지금 겸손 따위를 뽐내고 싶은 게 아니다. 그는 삶에 최대한 진지하게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이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때까지 살아왔던 어느 누구 못지않게 행복했다”가 <브루클린 풍자극>의 마지막 문장이다.
자아실현이 행복이라는집단적 착각이
삶을 지옥으로 만들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야
세계의 실현을 목격한다 이 소설에는 남자의 조카가 나온다. 그는 뉴욕에서 택시운전을 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브루클린 다리의 보름달 이야기는 내가 목격한 것처럼 생생하다.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는 찰나에 아치 사이로 막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이나, 그런 순간이면 보이는 거라곤 밝고 둥근 노란 달뿐인데, 그 달이 너무 커서 놀라게 되고 내가 여기 지구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날고 있는 중이라는, 택시에 날개가 달려 있어서 실제로 우주 속을 날고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되지요.” 택시운전사가 말하는 초월의 순간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의 설명에 따르면, 택시운전을 하면 극도의 피로감과 지루함, 정신을 멍하게 만드는 단조로움이 계속 이어지는데, 그러다가 뜬금없이 문득 일말의 해방감을 느끼면서 잠깐이나마 진지하고 절대적인 희열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 순간은 짧기 때문에 택시운전의 대부분은 대가를 치루는 과정이지만, ‘고통이 없으면 희열도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건 임시적 존재가 아니라면, 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는 내 생각과 비슷하다. 이걸 보르헤스의 말로 바꾸면 ‘실수가 없으면 시인도 없다’가 되리라. 보르헤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잘못된 인연, 잘못된 행동, 잘못된 환경과 같은 그 모든 것들이 시인에게는 도구랍니다. 시인은 그 모든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생각해야 해요. 불행조차도 말이에요. 불행, 패배, 굴욕, 실패, 이런 게 다 우리의 도구인 것이죠. 행복할 때는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행복은 그 자체가 목표니까요.” 문학에 끌린다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이 불행에 끌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이 끌림으로 다시 불행을 뛰어넘는다. 이번 계절에 배운 내용을 요약한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나는 제일 먼저 보르헤스를 반박하고 싶다. ‘그러나 행복 역시 이 삶의 목표가 아니다’라고. 행복을 추구하는 한, 우리는 잘못 살 수밖에 없다. <동물들의 침묵>을 쓴 존 그레이에 따르면, 행복은 자아실현이 이뤄지는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 이 자아실현이란 낭만주의 운동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아는 신처럼 독창적이고 고유하기 때문에 우리의 자아는 노력해서 발견되어야만 하며, 그때 인간은 행복해진다고 주장하니까. 하지만 그 독창적이고 고유한 자아라는 게 허구의 이야기라면? 우리 안에는 애당초 그런 자아가 없다면? ‘헬조선’(2030세대에게 지옥 같은 대한민국이라는 뜻의 신조어)이라는 게 있다면, 그 지옥은 내 안에 없는 자아를 찾아낼 때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집단적 착각으로 만들어진다. 실재와 허구 사이의, 아무리 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이 까마득한 심연의 지옥 속으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떨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존 그레이는 “자아실현이라는 개념은 근대의 허구 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이다”라고 단언한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더이상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보다는 지옥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하는 편이 낫다. 인간의 삶을 소모시킬 뿐인 낭만주의적 착각에서 벗어나 임시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 그렇게 온전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인 뒤에나 아주 이따금 실재는 브루클린 다리의 보름달처럼 그 모습을 드러낼 텐데,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그때까지 살아왔던 어느 누구 못지않게 행복’해지리라. 그러니까 실현되는 것은 이 세계이지, 우리의 자아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세계의 실현을 이따금 우연히 목격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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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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