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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부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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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연수의 ‘소년이로다’
자기 눈에만 보이는 것을 사랑하는 이십대에게
명절이면 서울의 극장에서 영화 보는 사람들이 꽤 부러웠는데, 올 추석에는 사정이 있어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는 바람에 나도 그 대열에 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부터 추석에는 꼭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시작은 성룡(청룽)의 <취권>이었다. 내가 처음 본 개봉영화였는데, 극장을 갈지자걸음으로 비틀거리며 나올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그 영화를 시작으로 10대 시절 추석 영화를 책임진 사람은 성룡이었다. 이번 여름에 개봉한 <도라에몽: 스탠 바이 미>에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엔지(NG) 장면들이 흘러나오던데 액션 장면에서 엔지를 내고 멋쩍은 웃음을 짓는 도라에몽의 모습에서 성룡을 떠올린 건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그런 시절은 곧 지나간다. 진구의 서랍 속으로 들어간 도라에몽처럼 그토록 좋아했던 것이 내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한 시절이 끝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내 눈에는 더 이상 사랑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이상하지 않은가? 도라에몽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가 사랑했던 남자는 여전히 거기 있지 않았는가? 나의 10대 시절이 끝난 뒤에도 추석마다 성룡이 영화를 만들었던 것처럼. 서랍 속으로 들어간 도라에몽도 아니고 거기 그대로 있는데, 왜 자신이 좋아했던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일까? 그건 내 눈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사랑은 원래 내 눈에만 보였다가 어느 순간 내 눈에서 사라진 것이니까. 나는 내 눈에 보이는 것만 사랑했으니까.
하지만 내 눈에만 보이는 사랑이 순식간에 사라져도 별문제는 없다. 내가 경상도 친구들에게 자주 듣던 조언처럼 세상에 여자는 ‘쌔고 쌨다.’ 물론 실제 상황이 닥치면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충고지만, 즉 ‘쌔고 쌘’ 그 여자들에게는 저마다 애인이 있더란 얘기지만, 대중문화에서는 꽤 위안이 된다. 더 이상 성룡 영화가 재미없다면 다른 영화를 보면 된다. 이십대가 되면서부터는 이른바 예술영화들이 좋아졌다. 사랑이라는 건 그 자체로도 좋지만, 사랑을 둘러싼 것들도 꽤 좋다. 독특한 향수 냄새, 그 집의 창에서 보이는 노을, 둘이서 자주 가던 작은 카페 등등. 예술영화를 좋아한다는 것 역시 그와 비슷했다. 서점에 나오자마자 구입하는 영화잡지, 누군가의 집에 모여서 함께 보던 비디오, 좋아하는 감독은 빔 벤더스나 허우샤오셴이나 짐 자무시라고 말할 때의 쾌감.
‘세상의 중심’이란 환상은실제론 세계 바꾸지 못해
홍상수의 영화는
그런 깨달음의 정수 내 눈에만 보이는 것을 사랑한 것처럼 ‘겉멋’ 때문에 예술영화를 좋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건 이십대가 종말을 고할 무렵이었다. 십대에는 공부를 잘해야 하고 삼십대에는 일을 잘해야 한다면 이십대에는 사랑을 잘해야 한다. 하지만 십대와 삼십대가 그렇듯, 이십대 역시 그 일을 가장 잘 못한다. 이십대에는 서로 맞지도 않는, 심지어 미워할 만한 사람들과 친구입네 애인입네 어울려 다니면서 온갖 한심한 일들을 해대는데, 그 미숙하고 멍청한 호감의 필연적 결과는 최소 말다툼에서 최대 주먹질이었다. 이뤄질 수 없는 애틋한 사랑 같은 게 세상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서로 안 만났으면 좋았을 사람들은 참 많이 봤다. 그때는 그런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어쨌든 같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사실만으로도 둘은 특별한 관계가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 이유는 잘 몰랐다. 왜 그래야만 하는 것인지. 그게 아마도 겉멋, 혹은 내 눈에만 보이는 사랑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부터였다. 십년 전만 해도 홍상수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 영화가 도대체 왜 좋은 건지 자신에게 설명 좀 해달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시는 이십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라고 말하면 이해했으려나.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분이 둘 있는데, 바로 김훈과 홍상수다. 이 두 분의 공통점은 은근 이십대를 깔본다는 점이다. 이십대가 세상의 중심인 양 정치권이나 언론에서는 이십대더러 정당을 접수하라느니 청년이 일어나야 나라가 산다느니 떠들어대지만, 그건 이십대들에게 이 세계의 중심이 자신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려는 속셈 때문이다. 왜 그런 환상이 필요한가? 그릇된 환상 속에 머물러야 실제 세계를 바꿀 힘을 가지지 못하니까. 하지만 다들 알 것이다. 이 나라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건 칠십대이고, 이 나라의 미래는 오륙십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정작 이십대에게 해야 할 일은 ‘힘내라, 청춘’ 따위의 달콤한 말이 아니라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다. 그러니까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고 미워할 만한 사람을 미워하는 방법 말이다. 장차 비정규직 노동자이면서 고향이 같다는 이유로 재벌을 옹호하는 정당에 투표하고, 자식 때문에 회사택시를 운전하면서 수학여행 간 아이가 왜 죽었는지를 납득하지 못하는 학부모를 맹비난하는 모순에 빠지지 않게 말이다. 모순이라지만, 그들의 눈에는 완벽하게 논리적이다. 마치 자기 눈에만 보이는 겉멋을 사랑하는 이십대처럼. 그들이 모순된 실재를 보지 못하고 완벽하게 논리적인 환상 속에 사는 한, 세계는 늘 그대로다. 정의는 실현되지 않고, 부는 소수에게 집중되며, 권력은 약자를 짓밟는다. 제대로 사랑하는 법, 그건 자신만의 환상 속에서 벗어나 그런 실재와 대면하는 일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왜 좋으냐면 결국 그런 환상 속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분께서 매년 새 영화를 만드시니 나로서는 행복할 따름이다. 올 추석에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봤다. 영화는 동일한 이틀을 반복하는데, 처음에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던 두 이야기가 끝부분에서는 아주 달라진다. 이십년 전이었다면 나는 이 영화를 이휘재가 아니라 홍상수의 ‘인생극장’쯤으로 여겼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그래, 결심했어!”라고 말하며 주먹을 불끈 쥔다고 해도 실재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변하는 것은 오직 나의 환상일 뿐이다. 첫번째 환상은 극중 영화감독인 함춘수의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아주 매끈하고 재미있다. 그러나 두번째는 좀 다르다. 이야기는 매끈하지 않고, 사람들은 뭔가를 감추고 있으며, 각자는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 두번째가 우리가 사는 실제 세계와 좀더 비슷하다. 자기 눈에만 보이는 환상과 실재의 이 차이가 이 세계의 비참함을 만든 장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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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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