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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4.15 19:51 수정 : 2015.04.16 10:19

사진 김현진 제공

[매거진 esc] 김현진의 애정동물생활

오래 아팠다. 이비인후과 종합선물세트, 갑상선, 췌장과 위염과 식도염까지. 프랑스 속담에 나오듯 불행은 결코 혼자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3월에는 집 밖에 나가본 것이 서너 번밖에 없을 정도로 침대에 접착제로 붙인 듯 딱 붙어 있었다. 겨우 일어나 걸음을 옮길 수 있었던 3월말, 분명히 마지막으로 나왔을 때는 겨울이었는데 순식간에 봄으로 뛰어넘어간 바깥 공기에 잠깐 정신이 아찔했다. 아직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비틀비틀, 기듯이 해서 겨우 애인을 만나러 갔다. 그렇다, 애인이다.

천안에 산 지도 1년 반이 넘어가고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다가 작년 말에야 겨우 팟캐스트 <과이언맨> 진행 때문에 밖에 얼굴을 내밀었으니 꽤나 외로웠을 법도 한데, 그 허한 마음을 달래준 것이 이 애인이다. 남자긴 해도 사람이 아닌 것이 조금 아쉽지만, 사랑하는 마음이야 진실이다.

어느 날 골목길을 지나다 보니 활짝 열린 대문 안 마당에 놓여 있는 개집에 고양이 한 마리(사진)가 기다란 개줄을 목에 매고 얌전히 앉아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개냐 고양이냐 할 때 호오가 확실히 갈리는데 나는 확실히 ‘개’ 파다. 그렇지만 얼굴이 양파처럼 둥근 고양이를 보면 사족을 못 쓴다. 거기에다 통통하고 벌꿀 색깔이면 완전히 취향을 직격한다. 이 고양이는 벌꿀색은 아니었지만, 나를 향해 부르듯 “야아아옹~” 하고 울었다. 다음 순간 나도 모르게 남의 집 마당으로 살금살금 주거침입을 하고 있었다. 고양이 잘 아는 분은 다들 아시겠지만 고양이들은 배를 만지면 죄다 화를 내는데, 요 수고양이 녀석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발랑 뒤집어져 배를 내밀며 빨리 만지라고 가르랑거렸다. “아유, 야옹이 예쁘지” 하며 얼굴을 보니 눈이 깜짝 놀랄 만큼 어여쁜 비취색이었다.

그후 요 녀석에게 홀딱 반해버린 나는 수시로 이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주거침입을 감행해 야옹이와 밀회하곤 했다. 어찌나 다정한지, 가뭄에 마른 땅처럼 쩍쩍 갈라진 내 마음에 야옹야옹 소리가 봄비처럼 촉촉하게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가 점점 더 친해지면서 야옹이는 볕 드는 자리에 실눈을 뜨고 앉아 있다가도 내가 지나면 눈을 반짝 하고 동그랗게 뜨곤 했다. 그날도 대문간에서 힐끔힐끔 야옹이를 찾고 있는데 등 뒤에서 웬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고양이가 없어?”

마침내 만난 집주인 할머니였다. 무단침입을 하려다 걸린 나는 제 발이 저려 어쩔 줄을 몰랐다. 할머니는 무심하게 빨랫감을 들고 지나가면서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 뒤에 있응게 봐봐, 고양이가 귀엽지?”

“네!” 하고 소리치고 따라 들어간 나는 고양이의 이름이 궁금했다. 할머니가 알려준 고양이 이름은 샛별이. 여고생인 손녀가 할머니 평소에 심심하겠다며 새끼 때 얻어다 준 고양이였다. 그 이후 우리는 어르신들 허락 아래 당당히 교제를 시작했는데, 점점 친해지면서 샛별이는 내가 가려고 하면 번개같이 달려들어 내 다리를 붙들고는 와락 부둥켜안았다. 물론 그 모습이 귀엽고 깜찍했지만 나는 청승맞게 가슴이 뭉클했다. 지금까지 누가 이렇듯 간절히 나를 붙들어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도로 주저앉아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샛별이는 와락 붙들고 있던 걸 풀었지만 여전히 앞발 하나를 얹어 내 신발을 꼭 붙들고 있었다. 아, 누가 이렇게 나를 잡아준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짠하게 잡아주기만 하면 뭐가 오든 다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김현진 에세이스트, 팟캐스트 진행자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졌지만 나는 이 비취색 눈동자를 한 오동통한 고양이를 떠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누가 나를 소중하게 잡아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풀벌레가 밤을 맞아 찍찍 울 때까지 나는 샛별이와 함께 앉아 있었다. 고마운 녀석. 결국 누구라도 나를 잡아주는구나. 그게 너구나. 제발 좀더 나를 지면에 붙들어주렴.

김현진 에세이스트, 팟캐스트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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