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9.09 19:36
수정 : 2015.09.10 10:48
[매거진 esc] 김현진의 애정동물생활
요즘은 천안에만 살아서 서울에 가면 눈이 휘황하다. 그래도 아는 데라고 서울 오면 찾아가는 상수동 카페 ‘그문화다방’에는 사람 나이로 이제 불혹쯤 되는 ‘김검둥’이라는 검정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있는데, 큰 개답게 거칠게 놀아줄수록 좋아하다가 요즘은 좀 시큰둥한 것 같다. 김검둥군이 초중딩 시절에는 내가 거칠게 놀아주곤 했다. 이 다방의 사장 김남균 대표는 내가 거의 혼이 나가서 검둥이와 놀고 있을 때 가끔 의아하게 보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말하곤 했다. “아, 이분은 우리 검둥이 친구야.” 김 대표는 특히 요식업을 창업하려면 꼭 읽어봐야 할 책 <골목사장 생존법>을 올해 출간하고,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월세 사장들의 흔한 골칫거리인 권리금 문제 등으로 힘차게 목소리를 내는 중이기도 하다.
검둥이도 이제 나이 사십이 되어 점잖아지고 나도 뼈마디가 쑤시다 보니 내가 그렇게 거칠게 놀았나 의심이 됐다. 김 대표가 “푸하하” 하고 웃었다. “아니 손님 없을 때는 둘이 뭐 거의 한 몸이 돼서 씨름을 하는지 레슬링을 하는지 카페 바닥에서 막 뒹구니까, 오죽하면 우리 손님이 아니고 검둥이 친구라고 그러겠어.” ‘우리 그랬어?’ 하는 눈으로 모른 체하는 김검둥을 보니 내가 그랬던 것도 같다. 그땐 그나마 좀 젊었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그리운 친구가 있다. 개 친구뿐만 아니라 그때 내게는 동네 고양이 친구도 하나 있었다. 사람을 보면 발라당 드러눕곤 하던 예쁜 삼색 고양이, 연령은 불명. 이십대가 끝나가는데 오늘도 제대로 된 어른에서 또 하루 멀어져 갈 뿐, 머물러 있는 청춘이 아니란 건 진작 알았건만 뭘 어쩔 줄 모르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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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치아. 사진 김현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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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원치 않는 결혼을 해서 새끼를 낳는다길래 “왜 뜻에 없는 결혼을 하고 그래” 하며, 내가 “루크레치아”(사진) 하고 부르면 고양이는 “야옹” 하고 울며 발목에 기댔다가 발라당 눕곤 했다. 루크레치아는 아버지인 교황과 오빠의 뜻에 따라 시집을 갔다던 이탈리아 여인의 이름에서 따온 거다. 동네에서 어떤 할머니가 기르다 버렸다는 녀석은 얼마나 착하고 예쁜지 집에 데려오고 싶었지만 집에 줄리아노 데 메디치(푸들)가 있던 시절이라 데려오진 못하고 사료만 줬다. 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다세대주택 주인 할아버지가 문을 잠가버려서 들어가질 못하고 초승달을 보고 있노라면 어김없이 “야옹” 하고 루크레치아가 나타나서 데구르르 굴렀다. 따뜻한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시멘트 바닥에 앉아 있노라면 속절없이 슬픔이 자꾸 찾아와서 억지로 비켜 앉곤 했다.
그해 봄에는 유달리 태어난 게 싫어 견딜 수가 없었다. 생일엔 더했다. 아무도 만나자고 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만나자 하지 않았다. “생일파티 안 해?” 하고 누가 물어서 “응 해야지” 하며 손님 대접할 음식을 사러 갔다. 친구를 하나 초대해서 잘 먹일 생각이었다. 동물병원에 가서 맛있는 특제 캔을 몇 개 사와서 집 앞에 쭈그리고 앉아 “야옹야옹, 어디 있어?” 하고 불렀더니 “야옹야옹” 하고 루크레치아가 나왔다. “오늘은 우리집에 가자.” “야옹야옹.” 그날은 루크레치아를 초대했다. “오늘은 내 생일이야. 우리집에 놀러 와.” “야옹야옹.” 접시에 고양이용 통조림을 열어서 차려주자 내 방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루크레치아는 “야옹” 하며 좋아했다. 두 캔을 다 먹는 동안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그래도 친구라고 통조림이라도 먹일 수 있잖아. 내년에도 초대할 수 있게 열심히 살아보자.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만족스럽다는 듯 접시를 싹 비우고 목덜미를 “가르릉” 하고 울리며 몸을 비비는 나의 고양이 친구는 참 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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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에세이스트, 팟캐스트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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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급하게 이사를 나오느라 ‘고양이 밥 주는 게 취미인 주인 할아버지가 잘 챙겨주겠지’ 하고 인사도 못하고 왔던 고양이 친구를 만나러 다음해에 가봤지만 만나지 못했다. 고양이 친구야, 네가 내 방에 놀러 왔던 봄만큼 나는 여전히 삶을 어쩔 줄 모르고 살고 있는데 한 번 더 너를 잘 먹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같은 초승달이 뜨면 안부가 궁금해서 와락 슬퍼지곤 하는 고양이 친구야. 살면서 누구를 생각할 때 이렇게 잘 살길 간절히 바란 적도 드문 것 같아. 참 예뻤던 고양이 친구야.
김현진 에세이스트, 팟캐스트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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