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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0.14 19:03 수정 : 2015.10.15 10:16

사진 김현진 제공

[매거진 esc] 김현진의 애정동물생활

내가 처음 우울증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을 대면한 것은 18살 때였다. 약국을 돌아다니며 사 모은 수면유도제가 위를 녹이는 통증(혹시 수면제를 이용해서 삶을 맺을 생각이 있는 분이라면 그 길을 먼저 간 내 충고를 참조하시라. 결코 자다가 편하게 죽게 되지 않는다. 요즘 약은 워낙 좋아져서 그렇게 사람을 죽일 정도가 되지 않도록 제약회사에서 교묘하게 양을 조절하기도 하지만 편안하게 잠을 자다가 숨을 거둘 수는 없다. 그 약들이 당신의 위를 녹이면서 느껴지는 생경한 통증에 결코 편하지도 않던 몽롱한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과 잭나이프로 베어낸 손목에서 흐르는 피 위를 날뛰면서 나를 구해낸 개 덕분에 결국 의식을 찾고 외래 접수를 위해 기어갔다가 응급실로 옮겨진 이후 정신과 치료를 권유받았다. 당시 알고 지내던 저명한 정신과 의사 선생님 덕분에 내 형편에 과분한 각종 검사를 받았다. 결국 내가 앓고 있던 우울증은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자라온 환경이 별로거나, 내가 특별히 나약하거나, 그래서가 아니라 내 뇌가 화학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는 탓이었다.

그 길고 지루한 검사들을 한 덕분에 이젠 차라리 오래 알고 지낸 지겨운 친구 같은 이 우울증을 누구 탓도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와 별개로 나는 엄청난 거절 공포증을 앓고 있다. ‘다정이 병이라면 나는 말기암이다’라고 자조적으로 한숨을 쉴 정도로 나는 어릴 때부터 병적인 관심종자였다. 하지만 관심종자를 만족시킬 만큼의 충분한 관심은 본디 없는 법이다. 20살이 넘어서까지 부모님께 매를 맞다가 결국 집안을 뒤집어 놓기 전까지 내가 철썩철썩 맞아온 역사는 꽤 어려서부터였으므로 꽤 길었고, 인구가 폭발하는 지구를 위해 애를 낳지 않는 척하지만 실은 경제적 능력을 차치하고 나는 내 안의 폭력성을 통제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출산이라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물론 출산도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치댈 때마다 나는 종종 “치아라 마” 하는 소리를 듣곤 했는데, 동갑인 이종사촌을 껴안으며 귀여워하는 어머니를 본 세돌 난 나는 입술을 꼭 깨물고 엄마의 옷자락을 끌고 구석으로 갔다. 눈물이 나려고 해서 턱이 덜덜 떨렸지만 꾹 참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엄마에게 있는 용기를 다 짜내서 생애 최초의 찌질스런 질문을 던졌다. “엄마, 저기… 엄마는 ××가 나보다 더 이뻐?” 나를 황당한 듯 쳐다보던 엄마는 코웃음을 쳤다. “그거 물어보려고 여기 불렀냐?” 그럴 리가 있니, 당연히 네가 더 예쁘지, 이런 대꾸를 간절히 원했지만 세상일이 마음대로 될 리가 있나. “그래, ××가 더 예쁘다. 됐나? 내 나간데이! 참 내….” 방에 남겨져서 찡찡 울면서 엄마가 돌아와주길 바랐지만 바깥에서는 친척들의 웃음소리만 들렸다. 이후 나는 더욱 관심종자가 되었고, 바깥에서 사랑을 찾다가 나와 남을 연이어 망쳤다.

돌아보니, 개들을 특히 사랑하게 된 것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지 않아도 돌려주는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관심을 구걸하지 않아도 그들은 이유 없이 나를 사랑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애정이었다. 심한 불면증을 앓는 내가 잠이 들면 옆에 앉아 있다가 누군가 깨울라치면 목소리를 낮춰 으르렁거리며 누구에게라도 이를 드러내던 줄리아노 데 메디치, 유난히 더웠던 이번 여름에 서로 땀띠가 날 만큼 내가 꼭 끌어안아도 메트로놈처럼 혀를 헥헥대면서도 그대로 버티어주던 둥이. 사람들은 흔히 개 같은 인간이라는 욕을 자주 쓰지만 그 개들이 그나마 나를 인간의 꼴을 갖추게 해준 것은 아이러니다. 그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어찌 고마운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김현진 에세이스트, 팟캐스트 진행자
나는 신의 자비로움을 종종 의심하지만 개라는 동물을 볼 때마다 신의 연민을 새삼 믿을 수밖에 없다. 신이 인간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개라는 동물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 하나는 참 고맙습니다.

김현진 에세이스트, 팟캐스트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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